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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을 잃은 언어(4)

중력을 잃은 언어(4)

-조이씨가……  아직도 격리 치료실에 있어요? -이번 프로젝트는 팀장의 시신 수습을 대외적인 목표로 삼고 있지만, 사실은 조이의 문제를 풀려고 진행되는 프로젝트입니다. 조이씨 상태는 철저히 비밀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 의사를 밝히셔야, 조이씨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타미의 말투엔 힘이 실려있었고,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미나에게 타미는

By 이안 -이 안의 숏텐츠
초세필 펜 : 가늘고 긴 분투

초세필 펜 : 가늘고 긴 분투

그 펜은 정말 가늘고 잘 써졌다. 0.28mm. 솔직히 숫자로 굵기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0.5mm, 0.7mm와 같은 대중적 사양의 비교대조군이 있기에, 굉장히 가늘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처음 만난 건 서촌 골목의 작은 문구점이었다. 기록과 관련된 소품을 파는 그곳은 손바닥 만한 작은 다이어리가 상징적인 곳이었는데, 그 다이어리에 적합한 초세필 펜도 구비해놓고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
그땐 그랬지

그땐 그랬지

햇볕에 달궈진 골목을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은 냉장고 속 수박이었다. 칼이 닿자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 수박은 여름을 통째로 품은 듯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한 조각을 베어 물면 턱끝으로 차갑고 달콤한 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시절 무더위를 이겨내는 보양식은 시원한 수박이었다. 그때 그 시절 어른들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흑염소탕,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적정선을 넘지 말 것 _ '혼코노'

적정선을 넘지 말 것 _ '혼코노'

어느 평일 퇴근 시간, 지하철역 근처 사거리 보행자 신호가 한꺼번에 초록빛을 냈다. 모든 방향 차량이 멈춘 거리 위,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건너갔다. 대각선 방향을 향해 발을 떼었을 때, 난데없는 고함이 들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본 곳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말쑥한 옷차림의 여성이 있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정확히 뭐라고

By 이표(李表) - 표류일지
말이 아닌 행동-에멀린 팽크허스트 (Emmeline Pankhurst)

말이 아닌 행동-에멀린 팽크허스트 (Emmeline Pankhurst)

영화 《에놀라 홈즈》를 보셨나요? 주인공 에놀라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 유도리아 홈즈의 흔적을 추적합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진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교양 있는 귀족 부인인 줄 알았던 엄마는 런던의 외딴 창고에서 화약을 제조하고 주짓수를 배우며, 기존의 판을 뒤흔들 거사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엄마 유도리아는 세상의 차별에 온몸으로 맞서던 비밀 서프러제트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방바닥에서 모나리자가 나를 보고 웃었어

방바닥에서 모나리자가 나를 보고 웃었어

귓전을 밀어붙이는 목소리 몸이 붙들린 사이 탈출한 눈길이 바닥 위로 미끄러지면 여기저기 숨어 있던 얼굴들이 고개를 들어 표정을 꺼내 놓아 장판 속 모나리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벽지 속 스크루지 영감은 코를 늘어뜨린 채 눈을 굴리지 꼼짝 못 할 때마다 사방에서 살아나는 기묘한 극장 뚝, 끊어진 잔소리에 자유를 얻은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10. 탈주 스캔들 (10) - 살살해요, 형사님

10. 탈주 스캔들 (10) - 살살해요, 형사님

“아, 모른 척 넘어가시는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있겠냐.” 인하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면서 좀 더 거리를 좁혀 다가온 해진을 곧게 응시했다. 낯선 데서 눈을 뜨자마자 수갑 하나로 해진과 묶여 있던 손목이 풀린 걸 눈치챘다. 처음엔 해진의 짓인가 싶었으나, 그랬으면 같이 배를 타는 대신 진즉 튀었을 것 같았고. “아시잖아요. 수갑 열쇠는

By 가넷베리Garnetberry - 가넷베리의 숏텐츠
마스킹 테이프 : 경계 너머

마스킹 테이프 : 경계 너머

나는 마스킹 테이프를 잘 모른다. 다이어리를 쓰지만, 기록할 뿐. 꾸미는데 재간도, 취미도 그다지 없다. 그럼에도 요즘 문구점에 들르면 으레 마스킹 테이프 코너 앞을 서성거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만지작거리다, 지금 안 사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고 합리화하며 기어이 한두 개를 들고나오곤 한다. 마치 마지막 남은 한정판 마스킹 테이프인 것처럼 하나둘 집으로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
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

평일 오전 여섯 시,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며 유부초밥 하나를 입안에 밀어 넣는다. 맛보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다. 휴일 오전 열 시, 냉장고 속 같은 재료는 나를 위한 요리가 된다. 누구는 스팸 달걀말이를, 누구는 달걀부침 반숙을, 누구는 달걀찜을. 거창한 레시피도 아니고 비싼 요리도 아니다. 하루를 내 뜻대로 시작하는 사소한 선택일 뿐이다.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뜨거운 가위를 내려놓기 전에

뜨거운 가위를 내려놓기 전에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필통에 있는 가위를 꺼내 친구에게 휘두름’ 학생 의뢰서에 적힌 내용이다. 교실 안에서 흉기라 불릴 만한 것을 휘두르는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 날카로움은 타인을 향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상담실에서 만난 아이는 의뢰서의 문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한 인상이었다. “왜 가위를 휘둘렀을까?” “친구가 수업 시간에 제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찬물에 속옷을 담그는 시간 _ 드라마《증언들》

찬물에 속옷을 담그는 시간 _ 드라마《증언들》

피가 샜다. 이불에 묻지 않아 천운이었다. 찬물에 속옷과 잠옷 바지를 담갔다. 짜증이 밀려왔다. 20년 넘도록 반복해 왔는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주기가 불규칙한 편이다. 캘린더 앱을 켜는 행위는 그저 습관일 뿐, 실제로는 몸의 신호로 시작일을 가늠했다. 이번엔 장마가 문제였다. 언제 산뜻했냐는 듯, 7월이 되자 내가 잘 아는 습한

By 이표(李表) - 표류일지
실패를 포장하는 진화생물학적 방식

실패를 포장하는 진화생물학적 방식

당장 이번 주에 마감해야 할 원고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큰 공간을 일상에 만들어 냈다. 집안에 좋은 기운을 들인다는 목표로, 대체 언제 열었는지도 모를 신발장을 정리하고, 출근하는 날마다 배달 음식으로 때웠던 날들을 반성하며 밀프렙이라는 시스템 도입에 품을 들일 수 있었다. 고작 한 주 뿐이었는데도 가슴을 누르고 있던 돌덩이를 치워버린 기분이었다. 그럴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운명의 올가미를 푸는 사적인 방법

운명의 올가미를 푸는 사적인 방법

한때 아주 유행했던 드라마에서 건진 대사가 하나 있었다. “운명은 신이 던지는 질문이고 그 답은 인간들이 찾는 것이다.” 운명론인지, 개척론을 따를 것인지, 그런 고민을 20대 내내 했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마지못해 살았고, 심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인간은 결코 신이 내린 운명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실험실 쥐에 불과하다며, 나를 상자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기분 전환 좀 해볼까?

기분 전환 좀 해볼까?

세탁물이 한쪽으로 쏠렸다는 UE(불균형) 에러 코드가 깜빡였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번번이 멈춰 서서 세탁기를 확인하느라 나의 외출 계획에 자꾸만 잡음이 났다. 집안일을 마치고 삼청동 미술관 무료 전시를 관람하려던 계획에 실타래가 엉켜 풀리지 않았다. 햇살 가득한 거리를 선글라스를 끼고 거니는 여행자를 상상했다. 여행 목적지를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으로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글라스펜 : 빛에 현혹

글라스펜 : 빛에 현혹

첫눈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과연 글씨가 써질까.  바디 전체가 영롱한 유리다. 끝으로 갈수록 섬세하게 꼬여 있는 팁과 투명하게 빛을 투과하는 몸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아름답지만,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도구.  17세기 베네치아에서 탄생했다는 글라스펜은 태생부터 빛에 가까운 도구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베네치아 유리 장인들은 빛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장인 중 누군가는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
중력을 잃은 언어(3)

중력을 잃은 언어(3)

움직이는 이송용 침대 위, 미나는 리듬을 입으로 세며 환자의 흉부에 규칙적으로 체중을 실었다. 정신없이 펄럭거리는 머리카락 사이, 분주한 시선 끝에 검은 그림자가 걸렸다. 반복적인 동작에 스치듯 담긴 검은색이 정지화면 같았다. 미나와 환자를 실은 침대는 빠르게 응급실로 들어갔다. -하, 맥박 잡혔어요. 권 교수님 호출하고, 흉부 엑스레이 준비해 주세요. 미나는 기름이 흐르는

By 이안 -이 안의 숏텐츠
권기옥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비행기를 배워 조선 총독부를 부수겠습니다.”  수천 킬로미터의 대륙을 홀로 가로질러 문을 두드린 이방 여인의 기백 앞에서, 마흔 살 군벌 총독의 완고한 빗장이 마침내 풀렸습니다. 윈난 육군항공학교의 견고한 금녀의 벽을 무너뜨린 이 호기로운 선언이, 고작 스물둘의 망명객 권기옥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거절당한 존재였습니다. 1901년 평양, 아들이 아니라는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높이의 치열함 VS 깊이의 치열함

높이의 치열함 VS 깊이의 치열함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 학교 그만둘래요.” 분 단위로 쪼갠 일과표,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은 순공 기록. 새벽까지 이어진 오답 노트와 스스로를 계속 점검하는 모습. 치열하게 살아온 그 아이는 플래너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결국 자퇴를 선언했다. 목표하는 대학의 등급컷에서 멀어지고, 자신의 노력을 ‘가망 없는 실패’로 정의한 결과다.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안내] 일부 게시글 보안 이슈 조치 완료

안녕하세요, 글진입니다. 최근 저희 사이트의 일부 게시글에서 비정상적인 스크립트가 발견되어 안내드립니다. 먼저 이용에 불편과 걱정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운영 작가 계정의 비밀번호가 외부에 탈취되어, 누군가가 그 계정으로 다수의 글 하단에 악성 유도 스크립트를 몰래 삽입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스크립트는 글 상세 페이지에서 본문 내용을 가린 뒤, 마치 인증 절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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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할 이유를 물은 당신에게,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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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듣자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내가 말할 타이밍이지만 또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 알량한 내 혓바닥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난 후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만이지. 속으로 생각했다. 암 진단을 받아 수술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파란 구두를 신고 설거지한다

파란 구두를 신고 설거지한다

스틸레토 힐(stiletto heel), 발끝이 뾰족한 구두로 또각또각 바닥을 울리며 바깥 세상을 향해 걷던 날들의 기억은 나를 알리는 일정한 방식이었다. 피나포어 에이프런(pinafore apron), 주름 장식이 달린 드레스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의 밥을 짓고, 집안을 돌보며 보낸 시간은 또 다른 나로 무장하는 옷에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하는 여성이었지요. 그러나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9. 탈주 스캔들 (9) - 콩가루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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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애인을 계기로 몸담은 조직에서 손 씻고 나오고 싶어 했을 조직원이, 해진의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그려졌다. “형도 마지막에는 후련해 보였어요. 좋은 데 갔겠죠.” 후천적으로 형성된 유사 가족 놀이. 그럼에도 어지간한 선천적 혈연보다 지독했을 관계였다. 혈기 왕성한 나이의 짐승들은 발목 잡는 걸 끊어내려 서로의 발목을 물어뜯어야 했겠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By 가넷베리Garnetberry - 가넷베리의 숏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