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

쓰는 사람의 온도가 스며든 도구의 내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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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세필 펜 : 가늘고 긴 분투

초세필 펜 : 가늘고 긴 분투

그 펜은 정말 가늘고 잘 써졌다. 0.28mm. 솔직히 숫자로 굵기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0.5mm, 0.7mm와 같은 대중적 사양의 비교대조군이 있기에, 굉장히 가늘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처음 만난 건 서촌 골목의 작은 문구점이었다. 기록과 관련된 소품을 파는 그곳은 손바닥 만한 작은 다이어리가 상징적인 곳이었는데, 그 다이어리에 적합한 초세필 펜도 구비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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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킹 테이프 : 경계 너머

마스킹 테이프 : 경계 너머

나는 마스킹 테이프를 잘 모른다. 다이어리를 쓰지만, 기록할 뿐. 꾸미는데 재간도, 취미도 그다지 없다. 그럼에도 요즘 문구점에 들르면 으레 마스킹 테이프 코너 앞을 서성거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만지작거리다, 지금 안 사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고 합리화하며 기어이 한두 개를 들고나오곤 한다. 마치 마지막 남은 한정판 마스킹 테이프인 것처럼 하나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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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펜 : 빛에 현혹

글라스펜 : 빛에 현혹

첫눈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과연 글씨가 써질까.  바디 전체가 영롱한 유리다. 끝으로 갈수록 섬세하게 꼬여 있는 팁과 투명하게 빛을 투과하는 몸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아름답지만,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도구.  17세기 베네치아에서 탄생했다는 글라스펜은 태생부터 빛에 가까운 도구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베네치아 유리 장인들은 빛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장인 중 누군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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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이후, 문구 : 인벤타리오 2026 문구 페어에 가보니

문방구 이후, 문구 : 인벤타리오 2026 문구 페어에 가보니

삼성동 코엑스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문구페어가 열린다기에 개막 당일 다녀왔다. 사전 티켓이 매진이라 인기를 예상했지만, 현장 체감온도는 그 이상이었다. 줄을 선 채로 발권만 1시간. 기다림 끝에 들어간 내부는 또 다른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일부 인기 브랜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됐는데 대기 시간만 3시간이 넘는 곳도 있었다. 맛집만 줄 서는 거 아니다.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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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 그날의 공기, 그날의 잔상

엽서 : 그날의 공기, 그날의 잔상

연희동 핫플 중 엽서만 파는 가게가 있다. 나지막한 간판을 모르고 지나치기를 여러번. 허름한 건물 3층에 자리한 공간은 웬걸, 제법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위 역세권도, 그렇다고 거창하게 꾸민 공간도 아니다. 좁은 공간에 무려 3천 여종이 넘는 엽서가 진열돼 있다. 작가의 짤막한 설명은 흡사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풍경도 있고 인물도,  애완동물도 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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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수첩 : 思痕(사흔)

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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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날개 : 욕망의 흑심

검은 날개 : 욕망의 흑심

나는 연필,하면 아빠가 떠오른다. 공부 한번 봐준 적 없고, 손톱 한번 깎아준 적 없는 아빠가 유일하게 깎아주신 게 연필이었다. 일요일 저녁, 아빠가 집에 있는 날이면 우리 사형제는 아빠 곁에 두런두런 둘러앉았다. 날짜 지난 신문지 한 장이 촥 펼쳐지면, 제각기 필통에서 연필만 골라 좌르르 쏟아놓는다. 뭉툭해지거나 흑심이 다 닳아버린 연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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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머 : 다정한 강박  - 불안을 길들이는 45분

타이머 : 다정한 강박 - 불안을 길들이는 45분

아침 9시. 나는 타이머의 분침을 숫자 45에 맞춘다. 기지개를 한번 시원하게 켜주고, 비로소 글쓰기에 돌입한다. 긴장감이 손가락에 동력을 달아준다. 거침없이 딸깍딸깍거리는 소리가 엔진이 되어 뇌를 일깨운다. 무엇이든 쓸 준비가 돼 있고 써나간다. 물론 이렇게 쓴 글 태반은 휴지통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시간감각은 인간의 원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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