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

쓰는 사람의 온도가 스며든 도구의 내밀한 기록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
노트·수첩 : 思痕(사흔)

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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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날개 : 욕망의 흑심

검은 날개 : 욕망의 흑심

나는 연필,하면 아빠가 떠오른다. 공부 한번 봐준 적 없고, 손톱 한번 깎아준 적 없는 아빠가 유일하게 깎아주신 게 연필이었다. 일요일 저녁, 아빠가 집에 있는 날이면 우리 사형제는 아빠 곁에 두런두런 둘러앉았다. 날짜 지난 신문지 한 장이 촥 펼쳐지면, 제각기 필통에서 연필만 골라 좌르르 쏟아놓는다. 뭉툭해지거나 흑심이 다 닳아버린 연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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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머 : 다정한 강박  - 불안을 길들이는 45분

타이머 : 다정한 강박 - 불안을 길들이는 45분

아침 9시. 나는 타이머의 분침을 숫자 45에 맞춘다. 기지개를 한번 시원하게 켜주고, 비로소 글쓰기에 돌입한다. 긴장감이 손가락에 동력을 달아준다. 거침없이 딸깍딸깍거리는 소리가 엔진이 되어 뇌를 일깨운다. 무엇이든 쓸 준비가 돼 있고 써나간다. 물론 이렇게 쓴 글 태반은 휴지통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시간감각은 인간의 원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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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 천 가지 얼굴 - 나는 무엇으로 남을까.

종이 : 천 가지 얼굴 - 나는 무엇으로 남을까.

소중해서 기록하기를 멈춘 노트가 있다. 벌써 십수 년 전 이야기다. 종로3가 낙원상가 앞, 손수레 행상이 즐비하던 거리에서 만난 수제 노트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빳빳한 표지가 먼저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속지를 보호하지 못하는 표지를 싫어한다.- 갱지 느낌의 속지를 만지작거리다 코를 대보니 진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1만 원짜리 지폐를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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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샤프 : 순수의 깜지와 몰입의 시간

제도 샤프 : 순수의 깜지와 몰입의 시간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나무와 흑연의 향기, 종이 위에 스치는 서걱거림, 공들인 시간만큼 조금씩 닳아가는 그 감각. 그러나 연필에게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쉽게 뭉툭해진다는 것.  끝까지 샤프할 수 없다는 것.  이름처럼 샤프한 샤프의 등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샤프의 선택권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누군가 인생 샤프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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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플래그 : 나비, 날다

필름 플래그 : 나비, 날다

- 조용히 날아앉았다가, 흔적 없이 떠나기를  1. 고치-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촬영에도 외장 하드가 사용되지만, 내가 한창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시절엔  ‘촬영 테이프’라는 것이 있었다. 보통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 60분에서 90분 짜리 테이프가 100개에서 150개 정도 쌓였다. 촬영 기간이 길어지거나 대작(大作 )인 경우엔 이 개수를 훨씬 뛰어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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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디오 스타일로펜 : 너의 쓰디쓴 밤을 나는 알고 있다

트라디오 스타일로펜 : 너의 쓰디쓴 밤을 나는 알고 있다

- 아류라 불리던 것들의 낮은 반란 1. 나는 아류다 나는 만년필의 아류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고, 나 또한 그 시선을 부정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이유이자 숙명이었으니까. 내 고향은 일본. 내가 바다 건너 한국까지 진출했다는 건, 그만큼 내 존재가치가 인정받았다는 의미겠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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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 지움의 미학 - 실수를 환대할 것

지우개 : 지움의 미학 - 실수를 환대할 것

1. 노트북 세대인 내가 다시 지우개를 드는 이유 나는 노트북 세대의 작가다.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문장을 쓰고 지우는 일이 나의 일상. Delete키는 나의 실수를 손쉽게 증발시킨다. 흔적도, 흉터도 남지 않는다. 단, 0.1초. 실수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사라진다. 지움이 이토록 가벼워진 시대지만, 내 노트북 옆엔 언제나 백지와 연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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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연필에 지우개를 달았나

누가 연필에 지우개를 달았나

내 어린 시절 연필은 늘 결핍의 상징이었다. 침을 묻혀 꾹꾹 눌러 써도 금방 닳아버리는 흑심(芯), 그 작은 손가락이 아릴 정도로 짧아지면 볼펜 깍지를 끼워 생명을 끝까지 연장하던 몽당연필. 기다란 국산 연필 한 자루도 호사였던 내게, 연필 뒤에 분홍색 모자를 쓰고 초록색 띠를 두른 ‘지우개 달린 연필’은 도구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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