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할 이유를 물은 당신에게, 공명
“왜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듣자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왔다. 내가 말할 타이밍이지만 또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 알량한 내 혓바닥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난 후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만이지. 속으로 생각했다.
암 진단을 받아 수술 일정을 잡고 항암 스케줄을 검토하는 사람이 열심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면 어떤 말을 뱉어야 할까.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가 아니라 마치 내게 ‘왜 살려고 애써야 하냐?’고 묻는 것 같은데. 그 견고한 체념 앞에서 내가 대체 뭐라고, 위로 따위 건네고 싶다고 섣불리 입술을 달싹거린단 말인가.
나는 나의 투병 경험에서 무용한 위로에 대해 체득한 바 있었다. ‘너는 괜찮을 거다’식의 근거 없는 낙관도 소용없고, ‘그래도 힘을 내’라는 식의 응원은 사람을 비뚤어지고 싶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어떤 말도, 어떤 조언도 의미가 없었다. 죽음에 손 끝이라도 닿았던 사람에게는 지독한 외로움만 존재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엄청난 실존의 고독은 그 자체로 고통의 냄새가 난다.
그나마 정신줄을 붙잡게 해주는 건 평소에 나를 아끼는 사람의 표정에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기도 하고, 소리 내 오열을 하기도 한다. 조금 당황스럽긴 해도 나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농담을 던질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했다. 어차피 나 혼자 겪어야 할 싸움이고 여정이지만 그걸 지켜보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한 명쯤 있는 건 썩 괜찮은 일인 것 같았다. 직접 발 벗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그것은 예견된 실패. 타인이 가진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절박한 기대에 못 미칠 위험은 생각보다 크다. 뭐라고 이름 붙이든 고통을 대하는 밀도는 당사자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러니 내가 지인의 체념 섞인 질문 앞에서 입을 다물기로 한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믿어보기로 했다. 인간이 목전에 있는, 자기 죽음 앞에서 보이는 행태와 받아들임은 다양할 테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많지 않기에.
정답이야 없겠지만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도록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저 가만히 당신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표정을 하고선, 내가 그 길을 지켜봐 주겠다는 마음을 눈빛에 실어 보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살짝 끄덕였던 것도 같았다. 그러자 지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내 담담해서 오히려 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것만 같았는데,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요란하지 않은 슬픔의 공기. 오전이면 동남향 햇빛으로 가득 찼던 내 집 거실에서 고개를 돌리자 부유하던 먼지들의 향연. 목구멍이 계속 간질거렸지만 나는 그 정도는 참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