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책 읽는 엄마, 책 짓는 엄마. 마음을 담아 덧칠해가는 그림과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흔적. 남겨야 하는, 지워야 하는

흔적. 남겨야 하는, 지워야 하는

창가에 앉아 밝게 빛나는 종이를 바라본다. 짧게 이어가는 손길로 조심스레 스케치한다. 그려진 선을 따라 춤추듯 여러 빛깔로 덧칠한다. 마음이 머문 그림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나만의 개성이 새겨진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둔다. 눈을 돌려 햇빛이 깃든 거실 한가운데를 바라본다. 보이지 않던 발자국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탁자에 마시고 올려 둔 유리잔에 입술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별 탈 없이 살아간다. 헤벌쭉 웃는 얼굴을 한 그저 밝은 사람, 그게 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며 누군가 겪는 일을 나도 한두 개쯤 경험하며 살아왔다. 작년에 쓸개 제거 수술받았지. 반복된 유산과 임신으로 치질수술도 두 번이나 받았지. 지천명을 내후년에 앞두고, 완경을 맞이했지. 아픔은 희미하게 남겨진 조각 하나뿐이길 바랐다. 말 주머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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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뺏기 놀이

모래 뺏기 놀이

하나뿐인 나를 나눈다. 보육에 나누고, 돌봄에 나누고, 나를 찾는 일에 조금 남겨둔다. 아들딸 셋, 다정한 남편, 양가 부모님 전부를 가졌지만 정작 나를 찾는 일에는 남은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배고프다는 한마디에 학교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는 말에 막힌 코를 연신 풀어대고 침을 삼키며 멍한 귀를 뚫어보려는 행동에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병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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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내려놓고 떠나자

잠시 내려놓고 떠나자

울음을 삼킨 채 떨리는 입술을 깨문다. 소리치고 싶지만, 입안을 맴도는 말을 삼킨다. 몇 번이고 꺼냈던 말은 끝내 닿지 못하고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온다. 그럴 땐 마음을 잠시 쉬게 할 나만의 피서지를 떠올린다. 따스한 햇볕 아래 눈을 감고 시원한 물결 속으로 발끝을 내밀어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 발가락 사이를 살랑대는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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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마음도 데운다

여름은 마음도 데운다

여름은 기온만 오르는 계절이 아니다. 몸은 햇볕을 받아 뜨거워진다. 마음은 흘려보내던 한마디에도 들끓는다. "네가 뭘 알아?" "너는 몰라도 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네 생각이 궁금해."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라도 온도는 전혀 다르다. 갑자기 내리꽂히는 소나기처럼 감정의 물살에 휩쓸렸다. 달아오르는 것은 살갗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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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빨래를 말립니다

오늘도 빨래를 말립니다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는 부드럽다. 그렇지만 구석구석 마르지 않을 때가 있다. 남은 습기는 쿰쿰한 냄새가 되기도 한다. 햇볕에 말린 빨래는 뻣뻣하다. 그렇지만 볕을 쬐며 옷감 사이사이까지 말끔해진다. 햇살을 오래 머금은 옷에서는 맑은 볕 냄새가 난다. 건조기의 열은 짧은 시간 안에 빨래를 포근하게 감싸고, 햇살의 온기는 바람과 함께 빨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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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그땐 그랬지

햇볕에 달궈진 골목을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은 냉장고 속 수박이었다. 칼이 닿자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 수박은 여름을 통째로 품은 듯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한 조각을 베어 물면 턱끝으로 차갑고 달콤한 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시절 무더위를 이겨내는 보양식은 시원한 수박이었다. 그때 그 시절 어른들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흑염소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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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

평일 오전 여섯 시,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며 유부초밥 하나를 입안에 밀어 넣는다. 맛보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다. 휴일 오전 열 시, 냉장고 속 같은 재료는 나를 위한 요리가 된다. 누구는 스팸 달걀말이를, 누구는 달걀부침 반숙을, 누구는 달걀찜을. 거창한 레시피도 아니고 비싼 요리도 아니다. 하루를 내 뜻대로 시작하는 사소한 선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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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전환 좀 해볼까?

기분 전환 좀 해볼까?

세탁물이 한쪽으로 쏠렸다는 UE(불균형) 에러 코드가 깜빡였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번번이 멈춰 서서 세탁기를 확인하느라 나의 외출 계획에 자꾸만 잡음이 났다. 집안일을 마치고 삼청동 미술관 무료 전시를 관람하려던 계획에 실타래가 엉켜 풀리지 않았다. 햇살 가득한 거리를 선글라스를 끼고 거니는 여행자를 상상했다. 여행 목적지를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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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구두를 신고 설거지한다

파란 구두를 신고 설거지한다

스틸레토 힐(stiletto heel), 발끝이 뾰족한 구두로 또각또각 바닥을 울리며 바깥 세상을 향해 걷던 날들의 기억은 나를 알리는 일정한 방식이었다. 피나포어 에이프런(pinafore apron), 주름 장식이 달린 드레스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의 밥을 짓고, 집안을 돌보며 보낸 시간은 또 다른 나로 무장하는 옷에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하는 여성이었지요.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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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무것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아 불안하다. 그렇지만 그냥 해본다. 이론만 배우기보다 실제로 해보며 배운다. 뒤로 미뤄봐도 어차피 누가 대신 해주지 않는다. 잘해서 빨리 하는 게 아니다. 모르니까 해치워 버리고, 시작했으니까 다시 하는 거다. 무언가를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 하지 않는다고 해도 방해되지 않는다. 해본다고 눈에 띄는 변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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