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책 읽는 엄마, 책 짓는 엄마. 마음을 담아 덧칠해가는 그림과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손바닥을 펼쳐 휴대폰을 볼 공간조차 없었다. 불빛의 반사 때문에 손을 움직이다 보니 앞사람 팔꿈치를 건드렸다. 등을 찌르기도 하고 스치기도 했다. 앞사람과 뒷사람 사이 10센티미터 미만. 그 공간에 나를 밀어 넣었다. 낯선 사람들, 등짝의 뜨거움이 나에게도 전달됐다. 머리 위에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조차 땀을 머금은 끈적한 뜨거움을 식히지 못했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콕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콕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ㄴ + ㅏ= 나 ㄴ + ㅓ= 너 나와 너의 차이, 겨우 모음 하나 바깥으로 삐쭉 나온 선, 그곳만 바라보던 ㅏ는 안으로 감춰진 선, 그곳에 숨어버린 ㅓ를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하나의 단어로 똑같아지길 바라며 간격을 좁혔다가 넓혔다가 그렇게 서로의 선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나와 너를 담은 글자를 알아간다. ㄴ+ㅏ+ㅓ = 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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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하늘 아래, 너와 나

가을 밤하늘 아래, 너와 나

강아지풀이 가득한 낙산성곽길 위에서 하늘을 바라봤다. 빛나는 건 붉게 물든 건물과 노랗게 물든 흥인지문뿐이었다. 둥근달은 짙은 어둠 속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풍성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려던 나는 고개를 떨궜다. 좁고 울퉁불퉁한 흙길, 발끝이 자꾸만 돌부리에 걸렸다. 앞서가던 너는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았고, 뒤따르던 나는 네 손에 이끌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성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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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듯 다르면 어때?

같은 듯 다르면 어때?

여럿 가운데 하나하나,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한다. 같은 듯 다른 모양을 만든다. 일정한 그 형태를 따라 그리려고 해도 매번 다르게 그려진다. 해마다 똑같이 송편을 빚었다. 전을 부쳤다. 차례를 지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느 조상님을 위한 건지 잊을 때가 많았다. 정해진 방식이 아닌 가끔 어쩌다 다른 모습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조용히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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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에서 숨을 고르다

문학 속에서 숨을 고르다

만약 우리 집이 모아타운으로 재개발되면 그땐 어디로 가야 하지? 추가 분담금은 얼마나 될까? 자녀 교육비와 노후 준비 사이에 무엇을 먼저 챙겨야 할까? 하나의 생각이 또 다른 생각에 닿아있었다. 엉켜버린 생각의 실타래를 잠시 내려놓으려 화면 속 이곳저곳을 떠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은 좀처럼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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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나를 꼬드겨

가을바람이 나를 꼬드겨

가을이 내게 손짓한다. 따갑게 내리쬐던 여름 햇볕은 가고, 따스하게 감싸는 가을 햇살이 내게 손짓한다. 밖으로 나오라고.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 살랑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짙어진 초록 잎이 나를 부른다. 내게 가을은 유혹의 계절, 자연 속에서 책도 읽고 풍경을 감상하는 그런 매혹적인 계절이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 살갗에 닿는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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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잊고 지냈던 보통의 날

보통의날

잠시 잊고 지냈던 보통의 날

가족들이 모두 나간 시간, 상자 속 뒤죽박죽 쌓인 더미에서 하나둘 물건을 꺼냈다. 읽고 있던 책, 미술관 전시 정보 책자, 문제집, 이면지, 미술용품 등등… 그중에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작년 이맘때 수묵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팽개쳐둔 겹겹이 쌓인 화선지 꾸러미. 펼쳐본 하얀 한지에는 먹물로 끄적인 짧은 글이 있었다.   오늘은 첫째가 학교 잘 다녀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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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겨야 하는, 지워야 하는

흔적. 남겨야 하는, 지워야 하는

창가에 앉아 밝게 빛나는 종이를 바라본다. 짧게 이어가는 손길로 조심스레 스케치한다. 그려진 선을 따라 춤추듯 여러 빛깔로 덧칠한다. 마음이 머문 그림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나만의 개성이 새겨진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둔다. 눈을 돌려 햇빛이 깃든 거실 한가운데를 바라본다. 보이지 않던 발자국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탁자에 마시고 올려 둔 유리잔에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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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별 탈 없이 살아간다. 헤벌쭉 웃는 얼굴을 한 그저 밝은 사람, 그게 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며 누군가 겪는 일을 나도 한두 개쯤 경험하며 살아왔다. 작년에 쓸개 제거 수술받았지. 반복된 유산과 임신으로 치질수술도 두 번이나 받았지. 지천명을 내후년에 앞두고, 완경을 맞이했지. 아픔은 희미하게 남겨진 조각 하나뿐이길 바랐다. 말 주머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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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뺏기 놀이

모래 뺏기 놀이

하나뿐인 나를 나눈다. 보육에 나누고, 돌봄에 나누고, 나를 찾는 일에 조금 남겨둔다. 아들딸 셋, 다정한 남편, 양가 부모님 전부를 가졌지만 정작 나를 찾는 일에는 남은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배고프다는 한마디에 학교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는 말에 막힌 코를 연신 풀어대고 침을 삼키며 멍한 귀를 뚫어보려는 행동에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병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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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내려놓고 떠나자

잠시 내려놓고 떠나자

울음을 삼킨 채 떨리는 입술을 깨문다. 소리치고 싶지만, 입안을 맴도는 말을 삼킨다. 몇 번이고 꺼냈던 말은 끝내 닿지 못하고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온다. 그럴 땐 마음을 잠시 쉬게 할 나만의 피서지를 떠올린다. 따스한 햇볕 아래 눈을 감고 시원한 물결 속으로 발끝을 내밀어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 발가락 사이를 살랑대는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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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마음도 데운다

여름은 마음도 데운다

여름은 기온만 오르는 계절이 아니다. 몸은 햇볕을 받아 뜨거워진다. 마음은 흘려보내던 한마디에도 들끓는다. "네가 뭘 알아?" "너는 몰라도 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네 생각이 궁금해."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이라도 온도는 전혀 다르다. 갑자기 내리꽂히는 소나기처럼 감정의 물살에 휩쓸렸다. 달아오르는 것은 살갗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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