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스펜 : 빛에 현혹

글라스펜 : 빛에 현혹
ⓒ 2026. Seosai All rights reserve

첫눈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과연 글씨가 써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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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전체가 영롱한 유리다.

끝으로 갈수록 섬세하게 꼬여 있는 팁과 투명하게 빛을 투과하는 몸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아름답지만, 실용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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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베네치아에서 탄생했다는 글라스펜은 태생부터 빛에 가까운 도구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베네치아 유리 장인들은 빛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장인 중 누군가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빛을 담는 재료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움은 종종 필요보다 앞서간다. 

글라스펜은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눈에 더 매력적인 도구다.

잉크에 펜촉을 찍어 쓰는 딥펜의 일종.

금속딥펜이야 써봤지만, 유리로 된 글라스펜은 처음이라, 관상용 펜인 줄 오해했다.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현혹의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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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라는 생각이 드는 펜이었지만

직접 써보고 나면 도구를 바라보는 기준이 바뀐다.

잉크에 팁을 담그는 순간, 나선형 홈을 타고 색이 올라온다. 

종이에 닿자, 유리가 사각사각 스쳤고, 잉크는 얇게 번지듯 깔린다.

울컥 쏟아지는 것 없이

골고루

꽤 길게

나선형의 팁이 많은 양의 잉크를 머금었다가 조금씩 뱉어낸다. 

찍고 쓰고, 다시 찍고 쓰는 리듬.

매번 잉크에 찍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번거로움이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리듬에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찍을 때마다 잠깐 멈추고

다시 쓰고

또 멈추고.

서두를 이유가 없다.

글라스펜이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때는 잉크를 바꾸는 순간이다. 

나는 글작업이 막히면 도구를 바꾼다.

도구의 종류를 바꾸거나 혹은 색을 바꾼다. 만년필은 가끔 발동하는 나의 사소한 변덕을 받아줄 만큼 성격이 유연하지 않다. 컨버터의 잉크를 씻어내고 다시 채우는 일은 그야말로 일이다. 한번 색을 바꾸면 또 바꾸고 싶은 열망이 귀차니즘에 꺾인다.

그런데 글라스펜은 다르다. 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닦아내기만 하면 된다.

반짝이는 보랏빛에서, 일렁이는 자줏빛으로 색을 바꿀 때마다 기분도 바뀌고, 기분이 바뀌면 손이 다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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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벤타리오 문구박람회에서 국산 글라스펜을 하나 더 들였다. 프랑스산 글라스펜 옆에 나란히 두어보니 출신도 다르고 홈의 모양도 다르다. 그러나 빛을 머금은 방식, 잉크를 밀어내는 원리가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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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역사는 짧지만 국산 글라스펜의 필기감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잉크색의 발현이 뛰어나고 요철감도 거의 없다.

가격까지 합리적이니 놀라운 발견이다.

국내 글라스펜 덕분에 가끔 하는 잉크 놀이가 더욱 즐거워졌다. 

좋은 펜...
내 사전엔 두 종류가 있다.

잘 써지는 펜과 쓰는 순간 기분이 좋아지는 펜.

글라스펜은 둘 다지만, 후자가 더 강하다.

유리니까 깨진다. 그래서 소중히 다뤄야한다. 

빛을 머금은 것들은 대개 그렇다. 

종이에 글씨를 남기는 행위가 이토록 시각적이고 아름다운 일이었다는 걸 - 

글라스펜을 쥘 때마다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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