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킹 테이프 : 경계 너머
나는 마스킹 테이프를 잘 모른다. 다이어리를 쓰지만, 기록할 뿐. 꾸미는데 재간도, 취미도 그다지 없다. 그럼에도 요즘 문구점에 들르면 으레 마스킹 테이프 코너 앞을 서성거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만지작거리다, 지금 안 사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고 합리화하며 기어이 한두 개를 들고나오곤 한다. 마치 마지막 남은 한정판 마스킹 테이프인 것처럼 하나둘 집으로 데려온 마스킹 테이프가 여러 개다. 우연찮게 모아둔 상자를 열어볼 때면 항상 똑같은 물음표를 던진다. ‘이걸 다 어디에 쓰지?’ 결론은 ‘언젠가 쓰겠지.’, ‘꼭 쓸데가 있을 거야.’라는 맥락 없는 타협으로 끝내기 일쑤다. 이 예쁜 쓰레기를 어쩐다?


합정동에 이 마스킹 테이프만 전문으로 파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 가면 맥락 없는 합리화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돌돌 말린 물감이란 재미난 이름을 가진 롤드페인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름값이라도 하듯 형형색색의 마스킹 테이프가 물감이나 페인트처럼 진열돼 있다. 들어서는 사람들의 입에서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색의 테이프도 있지만, 캐릭터가 그려진 것도 있고 기하학적 문양을 가진 것도 있다. 심지어 이 좁은 면 위에 풍경을 그려 넣은 것도 있다. 이쯤 되면 마스킹 테이프를 그저 다이어리 한 귀퉁이를 꾸미는 하찮은 도구쯤으로 생각했던 내 좁은 편견이 무안해진다.


놀라운 건 이 브랜드가 2019년에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 공간의 주인은 자유롭게 붙이고 뗄 수 있는 마스킹 테이프로 그림을 만드는 창작자다. 마스킹 테이프는 그녀에게 쉽게 수정할 수 있는 물감이었던 셈.
롤드페인트에선 고객이 마스킹 테이프로 롤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책갈피를 제공하는데, 마음에 드는 마스킹 테이프를 찢어 붙이며 여백을 채우는 과정은 꽤 즐겁다.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마스킹 테이프들이 묘하게 어우러지며 그럴싸한 책갈피 하나가 완성됐다. 이 책갈피가 마치 나 자신 같았다. 나란 인간 자체가 제각기 따로 노는 문양으로 이뤄진 모순덩어리가 아닌가. 단순히 모순덩어리라고 깎아내리기엔 결과물이 너무 예쁘다.

집에 돌아와 새롭게 들인 마스킹 테이프를 다시 들여다본다. 단조롭고 기하학적인 문양을 좋아하는 취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늘 똑같은 디자인과 색상의 옷을 사듯이 마스킹 테이프도 늘 비슷한 풍이다. 밝은색의 꽃문양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롤드페인트에서 만든 책갈피가 다른 얘기를 걸어온다. 무지성으로 붙인 책갈피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도 한데 모아 놓으니 조화롭다. 볼수록 제각각 다 달라서 더 예쁘다. 내 취향이 그동안 얼마나 한쪽으로 굳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누군가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만든다. 페인트나 물감의 경계를 실수 없이 긋는 용도로 탄생한 마스킹 테이프가 창작자가 겪는 실수와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도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 흥미롭다.

마스킹 테이프 앞에서 서성이던 그 시간이, 사실은 그 경계를 슬쩍 넘어보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사놓고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내 취향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조합을 시도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건 아닐까. 마스킹 테이프는 그 경계를 넘을 용기를 불어넣는다. 붙였다 떼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사소한 안전함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확고한 취향의 경계도 슬쩍 넘어도 된다고 속삭인다. 다음엔 평소라면 지나쳤을 무늬 하나를 집어볼 생각이다. 물론 계산대를 지나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