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포장하는 진화생물학적 방식

실패를 포장하는 진화생물학적 방식
Photo by Sangharsh Lohakare / Unsplash

당장 이번 주에 마감해야 할 원고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큰 공간을 일상에 만들어 냈다. 집안에 좋은 기운을 들인다는 목표로, 대체 언제 열었는지도 모를 신발장을 정리하고, 출근하는 날마다 배달 음식으로 때웠던 날들을 반성하며 밀프렙이라는 시스템 도입에 품을 들일 수 있었다. 고작 한 주 뿐이었는데도 가슴을 누르고 있던 돌덩이를 치워버린 기분이었다. 그럴 정도면 대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냐는 질문이 나오겠지만, 그 답은 나도 모른다,이다. 그저 안 하는 것만큼 이상한 일도 없기 때문 아닐까. 나는 누군가 내게 글을 안 쓰면 조바심 나는 유전자라도 주입해 놓았다고 상상하기를 즐기는 편이다.

그럴 거면 좀 수월하게 쓰는 습관도 좀 같이 넣어주지 그랬냐. 항변처럼 나는 산만한 내 일상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지는 미래를 그려본다. 매사가 복잡다단하고, 신경 쓸 일이 많은 내 일상은 글쓰기와 상극이라, 매일 투쟁하는 기분으로 지내고 있다. 책상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하는 사람의 일상이란, 자기혐오와 비난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거라는 걸 경험상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올 2026년의 절반을 그런 마음으로 보냈다.
정작 내 책은 뒷전이고 다른 책 작업만 하고 지냈다. 올해가 가기 전, 3권의 책을 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여름날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직 7월이니 적어도 한 권은 낼 수 있을 거라는 무용한 위로는 넣어두길. 지난 6개월 동안 숱하게 그 과정을 반복하고 또 실패를 일궈냈다.

그에 대한 나의 변명은 무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설명한 ‘병목형 생활사.’ 코끼리처럼 거대한 생물도 번식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 하나의 세포(정자나 난자)로 쪼그라 뜨리는 선택을 하는 걸 말한다. 생물이 일견 비효율적이고 위험해 보이는 선택, 즉 좁은 문(병목)을 통과하는 이유는 완벽한 리셋을 위해서다.
아니, 유전자도 리셋하는 마당에 내가 뭐라고 그걸 거슬러. 중요한 건 진화와 혁신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살펴보면 세상에 그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몸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단식을 하는 과정도 사실상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곡기를 끊는 일은 종종 죽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자가포식을 기대하며 몸 기능의 회복을 도모하는 단식을 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듯 마음의 부담을 더는 데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지능적이다. 다만 이 도식이 성공하려면 이른바 변화와 혁신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유념하고 있다. 자, 그래서 좁은 문을 통과해 온 후 혁신은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증명할 방법 같은 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쉬어가는 황금 같은 한 주 동안, 발행할 원고를 쌓아두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저한 단식이랄까. 좁은 병목을 통과하는 단세포가 주머니에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생산성이라는 기생충마저 완벽하게 굶겨 죽인, 지독하게 성공적인 비워냄이었다고 우겨본다. 그러니 이 짧은 글은 코끼리에서 단세포로 쪼그라든 자가 황금 같은 시간을 날려 버린 후 내놓는, 아주 그럴싸한 변명이라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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