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에 속옷을 담그는 시간 _ 드라마《증언들》

찬물에 속옷을 담그는 시간 _ 드라마《증언들》
이미지 출처: 드라마《증언들》(2026) 공식 포스터 © 2026 Disney and its related entities.

피가 샜다. 이불에 묻지 않아 천운이었다. 찬물에 속옷과 잠옷 바지를 담갔다. 짜증이 밀려왔다. 20년 넘도록 반복해 왔는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주기가 불규칙한 편이다. 캘린더 앱을 켜는 행위는 그저 습관일 뿐, 실제로는 몸의 신호로 시작일을 가늠했다. 이번엔 장마가 문제였다. 언제 산뜻했냐는 듯, 7월이 되자 내가 잘 아는 습한 여름이 되었다. 며칠째 습도가 나를 짓눌렀고 무거운 다리와 찌뿌둥한 몸이 주는 신호를 놓쳤다.

 

남들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하던데. 나는 5학년 때였는지 6학년 때였는지 헷갈린다. 어느 날 속옷을 여러 차례 갈아입어도 이상하게 남아 있던 흔적이 두려웠다. 이게 그거구나. 인지하고 나서야 배가 아프기 시작했고, 퇴근한 엄마에게 두서없이 말했다. 그때 엄마가 웃었던가. 안타까워했던가.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날 아픈 배를 부여잡고 등교하던 길에 만난 친구마다 소식을 알리던 장면은 생생하다. 먼저 시작한 친구들에게는 소속감을, 아직인 친구들에게는 우월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익숙함과 별개로, 도대체 언제까지 감당해야 하나 싶어 아연한 순간은 자주 찾아온다. 소염진통제를 입안에 넣으며 머릿속을 질문으로 가득 채운다. 안 해도 걱정되고 해도 짜증만 나는 이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드라마 《증언들》은 초경을 마주한 두 소녀의 상반된 태도를 그린다. 오염과 전쟁으로 출생률이 극도로 떨어진 미래, 극단적 종교 이념을 내세운 쿠데타로 ‘길리어드’가 세워진다. 그곳의 소녀 에그니스는 혼자 경건한 마음으로 학교 종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온 힘을 다해 줄을 잡아당기자, 교정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첫 피를 흘린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하러 달려 나온다. 한마음으로 기뻐하는 가운데, 에그니스는 불임에서 벗어나 ‘생식 가능한(fruitful)’ 상태가 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는 이제 결혼할 ‘자격 있는(eligible)’ 자로 취급되며 ‘플럼’에서 ‘그린’으로 한 단계 오른다. 초록색 옷으로 바꿔 입는다는 말이다.

 

데이지는 달랐다. 휴지에 피가 묻어나온 것을 알자마자 이를 감춘다. 주변에 있는 손수건 아무거나 집어 피를 닦고서는 흐르는 물에 서둘러 흘려보낸다. 그가 입은 흰색 옷은 피의 흔적을 감추기 쉽지 않을 테니, 데이지의 불안함이 시각적으로도 와 닿는다. 데이지는 길리어드를 무너뜨릴 정보를 빼내기 위해 길리어드에 잠입한 상태였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린’이 될 순 없었다.

 

이미지 출처: 드라마《증언들》(2026) 공식 스틸컷 © 2026 Disney and its related entities.

 

길리어드는 ‘잘못된’ 곳이었다. 여성을 억압하며, 출산을 위한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데이지가 학교에서 배우고 내가 세상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그곳을 유토피아로 묘사하고 포교하는 선교사 여성들의 행위는 자기 기만적이었다. 결혼과 출산만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자란 소녀들은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그런 소녀들을 구출하는 단체 ‘메이데이’는 절대 선(善)이어야 했다.

 

데이지는 혼자만 답을 아는 사람인 양 소녀들을 불쌍히 여겼다. 반대로 에그니스에게 길리어드 밖의 사람들은 풍족함을 누리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이며, 메이데이는 ‘상식’을 무너뜨리는 절대 악(惡)이었다.

 

정의를 대척점에 두고 마주하는 두 소녀를 보며,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결혼과 출산의 궤도에 어떠한 비판 의식도 없이 안착하는 친구들을 답답해했던 내 오만함이 선명해졌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했다고 해서 감히 재단할 ‘자격이 있’던가. 어떠한 비판 의식이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색으로 구분된 옷을 벗고 나면 결국 ‘피 흘리는 몸’이라는 정직한 영역만 남는다. 아픈 배를 은근히 자랑하며 느꼈던 첫 소속감, 그것은 캘린더 앱에 남긴 기록보다 원초적인 몸의 감각이었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친구들과 대화 주제는 달라졌다. 모질게도 그 대화가 항상 달갑지는 않다. 그럼에도 찬물에 피 묻은 속옷을 담그는 일상, 그 안에 여전히 나의 다정한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Read more

중력을 잃은 언어(4)

중력을 잃은 언어(4)

-조이씨가……  아직도 격리 치료실에 있어요? -이번 프로젝트는 팀장의 시신 수습을 대외적인 목표로 삼고 있지만, 사실은 조이의 문제를 풀려고 진행되는 프로젝트입니다. 조이씨 상태는 철저히 비밀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 의사를 밝히셔야, 조이씨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타미의 말투엔 힘이 실려있었고,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미나에게 타미는

By 이안 -이 안의 숏텐츠
초세필 펜 : 가늘고 긴 분투

초세필 펜 : 가늘고 긴 분투

그 펜은 정말 가늘고 잘 써졌다. 0.28mm. 솔직히 숫자로 굵기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0.5mm, 0.7mm와 같은 대중적 사양의 비교대조군이 있기에, 굉장히 가늘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처음 만난 건 서촌 골목의 작은 문구점이었다. 기록과 관련된 소품을 파는 그곳은 손바닥 만한 작은 다이어리가 상징적인 곳이었는데, 그 다이어리에 적합한 초세필 펜도 구비해놓고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
그땐 그랬지

그땐 그랬지

햇볕에 달궈진 골목을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은 냉장고 속 수박이었다. 칼이 닿자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 수박은 여름을 통째로 품은 듯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한 조각을 베어 물면 턱끝으로 차갑고 달콤한 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시절 무더위를 이겨내는 보양식은 시원한 수박이었다. 그때 그 시절 어른들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흑염소탕,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적정선을 넘지 말 것 _ '혼코노'

적정선을 넘지 말 것 _ '혼코노'

어느 평일 퇴근 시간, 지하철역 근처 사거리 보행자 신호가 한꺼번에 초록빛을 냈다. 모든 방향 차량이 멈춘 거리 위,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건너갔다. 대각선 방향을 향해 발을 떼었을 때, 난데없는 고함이 들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본 곳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말쑥한 옷차림의 여성이 있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정확히 뭐라고

By 이표(李表) - 표류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