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결벽 도구들 : 읽지 않은 것처럼

독서 결벽 도구들 : 읽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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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할 때 한가지 원칙이 있다. 책을 더럽히지 않을 것. 되도록 읽은 흔적조차 남기지 말 것. 어떤 이는 책에 남은 흔적과 역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다. 언제나 새 책 같은 책의 겉장을 넘길 때, 그리고 읽다가 '아, 처음 읽을 때도 바로 이 부분에 머물렀었지.', '아! 그땐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다르게 읽히네.' 하는 기억을 되새김질하면서 샘솟는 도파민과 카타르시스를 즐긴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내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하나 같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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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부터가 그렇다. 내가 책갈피를 선택하는 기준 역시 한가지인데 책에 흔적을 남기지 말 것. 읽다가 접는 거 내 책에선 불가하다. 영원히 구겨진 채로 남는 게 싫다. 이 조건엔 지류가 제격이다. 한때는 영수증을 책갈피로 사용했다. 매일매일 생기는 종이인 데다, 언제 어디서든 꺼내쓰기 좋은 휴대성이 좋았다. 다만, 발암물질 이슈와 전자영수증의 등장으로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요즘은 입장권 같은 티켓이나 물건을 살 때 주는 브랜드 명함을 유용하게 쓰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을 때도 있지만, 이 책 저 책 옮겨가며 읽는 편이라, 잃어버려도 부담 없는 책갈피가 나는 좋다. 물론 책갈피를 아예 사지 않는 건 아니다. 아끼는 책갈피 중엔 알라딘에서 구매한 자개 책갈피도 있다. 종이라서 코팅지를 입혀 쓴다. 나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적당히 보는 재미가 있는 도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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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의 책 문진도 같은 이유로 곁에 있다. 책을 한번 덮으면 다시 펼치지 않을 것 같아서, 뒤집어 놓고 자리를 비운 기억이 있나? 운이 좋아 훼손없이 그대로 있을 때도 있지만, 벌려둔 그 부분의 책장이 구겨지거나 혹은 책표지에 커피 등이 떨어져 오염될 때도 있다. 책 문진은 그럴 위험을 줄여준다. 주로 집에서 사용하는데 펼친 책이 제멋대로 닫히는 걸 다정하게 눌러주는 정도의 존재감이다. 책등을 억지로 꺾어 펼쳐두지 않아도 책 문진이 자연스럽게 그 수고를 대신해 준다. 책을 읽다가 마음 편히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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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책에 연필이나 하이라이터를 쓰는 건 문제집 같은 참고도서류에 한정해서다. 그 밖의 소장용 책의 경우 밑줄이 필요할 땐 주로 인덱스나 플래그를 사용하는데, 최근에 레드라인 롱인덱스라는 녀석을 발견하고 매일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뺐다를 반복하며 노려보고 있다. 이 인덱스를 들이면 이미 쌓여있는 인덱스들이 사용처를 잃게 될 것 같아 자제 중이다. 옷처럼, 왜 돌아서면 또 사고 싶은 문구가 등장하는 걸까. 

사진 출처 : https://tool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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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문구나 혹은 감상을 메모할 땐 요즘 가장 자주 손이 가는 건 투명한 점착 메모지다. 기억에 남는 문구는 점착 메모지에 손으로 적어보기도 한다. 나는 글쓰기 공부에 필사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마음에 남는 문구는 꼭 다시 한 번 써본다. 단순히 밑줄을 긋고 지나가는 것과는 다른 밀도가 있다. 점착 메모지는 다시 떼어내도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다. 어제는 결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문장이 오늘 다시 보면 그저 평범한 문장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메모지를 슬쩍 떼어내는 손맛이 있다. 책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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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엔 북커버. 유난히 애정이 가는 책은 책을 사자마자 비닐커버를 씌우는 편이다. 아무래도 책의 겉표지는 훼손되기 쉽다. 특히 가방에 넣고 다니다보면 다른 물건들과 부딪혀서 책 모서리가 닳거나 크고작은 긁힘자국이 생긴다. 오래 전에 사서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이 북커버는 인조가죽인데도 거의 변형이 없어서 마음에 든다. 책갈피가 달려있는데 생각보다 유용하다. 가벼워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라는 것도 장점이다. 

이 도구들은 책을 읽는 행위 자체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내게는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내게 책을 읽는다는 건 내용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흐르게 두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책에 무엇을 남기기보다, 책을 읽는 동안 머물 것을 곁에 둔다.  책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첫 독서의 기억이 공기를 빵빵하게 보충한 튜브처럼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는 읽은 테가 나서, ‘아 읽은 책이지’ 라며 다시 거들떠 보지 않는 것보다, ‘어? 이거 읽었던가?’ 하면서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방식을 좋아한다. 읽은 책들을 모두 섬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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