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그땐 그랬지
ⓒ 2026. 이지선. All rights reserved.

햇볕에 달궈진 골목을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은 냉장고 속 수박이었다. 칼이 닿자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 수박은 여름을 통째로 품은 듯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한 조각을 베어 물면 턱끝으로 차갑고 달콤한 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시절 무더위를 이겨내는 보양식은 시원한 수박이었다.

그때 그 시절 어른들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흑염소탕, 영양탕, 장어탕, 오리탕···. 뚝배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을 떠먹으며 “아, 살겠다.” 하고 말한 뒤 이마에 맺힌 땀을 연신 닦았다. 기운이 달리는 날이면 들깻가루를 넣은 뜨거운 국물이 식탁에 올랐고, 구수하기보다는 묵직하고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엄마는 그저 몸에 좋은 고깃국이라고만 했다. 그 말에도 나는 한 숟가락도 떠먹지 못했다. 복날이 지나고 나면 냉동실 한쪽에 있던 시커먼 넓적다리도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끝내 그것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그 시절의 어른이 되었다. 설거지하다 그릇 하나를 놓치고, 무거운 냄비를 들면 손목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면 무릎이 먼저 대답한다. 여름이 되면 수박보다 삼계탕이 먼저 떠오르고, 얼음물보다 미지근한 보리차 한 잔이 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서늘한 수박이 뙤약볕을 피하는 아이들의 특권이라면, 끓어오르는 탕을 삼키며 삶의 열기를 버텨내는 것은 어른의 몫이다. 나도 어른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그림책<밥 먹었니?> (2022) ⓒ 2026. 이지선.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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