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세필 펜 : 가늘고 긴 분투
그 펜은 정말 가늘고 잘 써졌다. 0.28mm. 솔직히 숫자로 굵기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0.5mm, 0.7mm와 같은 대중적 사양의 비교대조군이 있기에, 굉장히 가늘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처음 만난 건 서촌 골목의 작은 문구점이었다. 기록과 관련된 소품을 파는 그곳은 손바닥 만한 작은 다이어리가 상징적인 곳이었는데, 그 다이어리에 적합한 초세필 펜도 구비해놓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0.5mm의 펜 일색이라, 성큼 0.28mm펜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잡는 순간 ‘이게 제대로 써질까?’ ‘뚝뚝 끊기다가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정도로 가는 펜을 처음 써보는 건 아니다.
선이 가는 펜을 좋아해서 0.25mm 하이테크 펜을 쓰곤 했는데 유난히 뽑기운에 따라 끊김이 심하고 펜촉이 자주 나가, 결국 0.5mm로 회귀했다.
집으로 돌아와 시험삼아 글을 써보았다. 그런데 이 펜은 하이테크 펜과 딴판이다. 훨씬 부드럽게 전진한다. 고작 0.03mm의 차이. 인간의 눈으로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굵기 차이지만 기술차는 훨씬 커 보인다. 긁는 듯한 필기감의 하이테크 펜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드러질 정도의 미끄러움이다. 선이 얇은 만큼 글씨는 더 조용하고 또박또박 나왔다. 줄이 비좁은 다이어리의 한줄에 또렷한 글씨가 남는다.
초미세 0.28mm의 펜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영역이다. 0.28mm까지 선의 굵기를 줄이려면 펜끝 볼의 직경을 0.28mm까지 줄여야한다. 하지만 볼이 너무 작으면 잉크의 흐름이 막히거나 종이가 긁히거나 볼이 빠지거나 하는 문제가 쉽게 발생한다. 문구업체들은 앞다둬 니들팁 기술을 발전시켰다. 또한 잉크의 점도와 건조 속도도 문제다. 너무 묽으면 번지고 되직하면 작은 구멍으로 나오지 않는다. 빠르게 마르면서도 부드럽게 흐르는 저점도 잉크를 개발하는 일도 관건이었다. 결론적으로 0.28mm펜은 ‘가장 얇은’ 선을 위해 현존하는 펜 기술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결과이다. 가는 팁인데도 부드럽고 막힘이 적고 잉크 흐름 또한 안정적이다.

각종 플래너와 손글씨 문화가 퍼지면서 정밀하고 깔끔한 선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두꺼운 펜은 작은 칸에 여러 줄 쓰기 어렵고 지저분해 보인다. 선이 가는 펜은 잉크양이 적어 블리드(번짐)와 고스팅(뒷면 비침)이 적다. 공간이 비좁아도 여러 정보와 이야기가 담긴다. 두꺼운 굵기로 한 번에 휘갈기는 것보다 가늘고 길게 이어가는 맛이야 말로 초세필 펜의 참맛이다.
초세필 펜을 다루면서 직장 생활이나 인생을 이야기할 때 자주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늘고 길게 살자.”
나는 항상 그렇게 되뇌곤 했다. 큰 성공, 한 방에 터지는 인생작 한편을 써내는 것도 좋지만,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책을 써내는 삶 또한 멋진 거 아니냐고. 나는 작가로서 후자의 삶을 살고 싶다고.

그런데 살다 보니 길고 가늘게 사는 삶 역시 녹록치 않다. 한방에 뜨는 걸작을 쓰는 그것만큼이나 힘든 삶이란 걸 깨닫는다. 굵은 펜은 한 획으로 존재를 증명하지만 초세필 펜은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초세필 펜은 오래 쓰다 보면 손가락 끝에 힘이 이상하게 몰린다. 굵은 펜이었으면 대충 흘려써도 될 것을 매번 매끄럽게 나가는 각도와 힘을 찾게 된다. 한 획을 잘 그었다고 다음에도 똑같이 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펜을 고쳐 잡는다.
가늘고 길게 산다는 건, 어쩌면 매번 초세필 펜을 고쳐 잡듯 매번 새로운 생태계에 직면하고 이를 뚫고 나가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0.28mm의 초세필 펜처럼 처음엔 고되고 서툴기만 한, 가늘고 긴 삶 역시 끝끝내 버티면 노련해져서 만만해질 날이 오는 건 아닐까?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다루기 힘든 도구였던 초세필 펜이 시간이 지나며 닙과 잉크 흐름을 정교하게 발전시키면서 펜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처럼 말이다.
결국 버티는 게 답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