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우리에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집에서 삶을 나누는 사람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촌수로 이어진 관계들이 있겠지요. 남편을 기준으로 하면 어머니,아버지, 그 위로 이어지는 할머니까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엄마, 아빠까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져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는 모두 같을까요?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체육대회가 끝난 운동장에는 종이 응원 도구 몇 개가 굴러다닌다. 하루 종일 울리던 음악은 멈췄고, 스피커에서는 잡음만 흐른다. 아이들은 하나둘 교문을 나선다. 반티 위에 겉옷을 걸치고, 친구들과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웃는다. “이 사진은 계속 봐도 웃겨” “내 표정 완전 이상해. 이거 반톡에 올린다.” 오늘은 분명 시끄럽고 즐거운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단어들이 내려가지 못하고 둥실둥실 떠다닌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고 뜬구름처럼 흐른다. 수신자도 발신자도 잃어버린 이곳에선 소리로 만들어진 언어라는 건 무용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우주복에 자막을 달아버렸다. 딱 그만큼 무거워진 우주복을 입고 단어들을 발사했다. -팀장님, 보이십니까? 제 뫌이 보이쉽니까? -이건 우리가 모두 청각장애인이 된 거 같은 기분이군. -에이 그건 좀 심한 뫌
숏츠를 내려보다 요즘 방영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스크롤을 멈췄습니다. 조선의 여인이 현재로 타임슬립해 면접장에 나타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임윤지당을 차례로 언급하며, 이런 세상이라면 비혼을 선언하고 자기 분야의 제1인자가 되겠노라고 당차게 말합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임윤지당은 조금 낯선 이름입니다. "성인(聖人)과 나는 동류다." 조선 시대
[ 예? 담당 인력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그럼…… 여보세요, 듣고 계십니까? ] 인하는 해진과 묶인 상황도 잊고 펄쩍 뛰었다. “그래서, 어떻게 윗선이랑 딜을 하실 건데요?” “입 좀 다물어. 결정해도 내가 결정할 문제거든.” “아, 우리 형사님께서 또 귀엽게 고집을 부리시네.” 해진이 씩 웃으며 인하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면 이제부터 형사님께서 내 눈치 보는 거군요?
나는 연필,하면 아빠가 떠오른다. 공부 한번 봐준 적 없고, 손톱 한번 깎아준 적 없는 아빠가 유일하게 깎아주신 게 연필이었다. 일요일 저녁, 아빠가 집에 있는 날이면 우리 사형제는 아빠 곁에 두런두런 둘러앉았다. 날짜 지난 신문지 한 장이 촥 펼쳐지면, 제각기 필통에서 연필만 골라 좌르르 쏟아놓는다. 뭉툭해지거나 흑심이 다 닳아버린 연필들.
중학교 때 체육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반에 체육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오래 전 일이고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 애 이름과 얼굴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우리가 친한 사이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만 그 애는 2차 성징을 비교적 빨리 겪었고, 그래서 우리보다 더 일찍 당황스러움을 경험해야
순정으로 불타는 사랑으로 그러다가 전우애로 그러다가 애증으로 그러다가 측은함으로 다시 애정으로 다시 사랑으로 다시 전우애로 그러다가 미움으로 다시 애정으로 부부는 A였다가 B였다가 A+B, A-B, A*B, A/B 사칙연산을 하고 혼합계산을 하는 답을 찾고 만들어가는 사이.
현금 3만 원을 들고 주말 동묘시장에 갔다. 한 다큐멘터리에 나왔다며 엄마가 방문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어버이날이 하루 전이었으니 군말 없이 따랐다. 뉴트로 열풍과 함께 전통시장이 ‘힙’해진 것은 꽤 오래전이지만, 그중 동묘시장은 최근까지도 흐름이 유지되고 있었다. 내심 한번은 방문해 보고 싶기도 했다. 동묘시장에 가까워지자 그 시장의 원래 주인이었던 어르신들은 물론, 10대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자의 마음입니다. 저와는 다르게 키우시는 부모가 많음을 알지만, 필자가 느낀 쉽지 않은 심정을 전달하고 싶어서 표현해 봤습니다.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고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부모가 되었다. 그것도 3명의 아이를 가진 부모가. 내가 과연 이 어린아이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매 순간 고민한다. 먹고 자고 싸고, 기본 생존에 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