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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리 개의 입

아홉 마리 개의 입

구부정하게 웅크린 개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배를 낮게 깔고 있어 오늘 밤은 누군가 흠뻑 젖겠군 구덩이를 파고 있던 개가 콧 등의 흙을 털어낸다 구역질이 나 사람들이 또 무언가를 묻고 갔어 구경만 하던 개는 마른 꼬리를 흔들고 눕는다 구태여 파헤칠 것 있나 비 오면 흙이 알아서 입 다물 텐데 구둣발에 차이던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나혜석

나혜석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처에게 순결을 요구하면서 남의 처에게는 정조를 빼앗으려 하오. 남녀가 다 같이 불완전한 인간이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야 할진대 어찌 여성에게만 순결의 멍에를 씌우려 드는가.” — 나혜석, 「이혼고백서」 (잡지 『삼천리』, 1934년 8월호·9월호 연재) 세기의 이혼 소식이 들려오고 포털과 유튜브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누구의 잘못인지, 위자료와 재산분할은 몇 대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얼음 — 다시 시작이 두려운 이유

얼음 — 다시 시작이 두려운 이유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얼음” 땀을 흘리며 가장 열심히 뛰던 아이가 멈췄다. 여전히 팔은 뻗어있고, 한쪽 발은 든 채로 얼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달릴 수 있어 보였지만, 술래는 그 친구를 뒤로한 채 방향을 틀어 다른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주변 친구들도 잠시 눈치를 보지만, 그 친구에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얼은 친구는 놀이에서 탈락했는가?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그해 여름, 수영장

그해 여름, 수영장

해가 넘어가는 시간은 지독한 졸음을 동반했다. 내 무릎에 가만히 앉아 쌕쌕 숨소리만 내뱉고 있는 아이를 안고 나는 종종 잠에 빠지곤 했다. 아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곧잘 칭얼거리며 다음 이야기를 채근했다. 자그마한, 말 못 하는 등은 동화책의 아기자기한 그림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나는 전날 밤의 음주로 매일 숙취에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가을바람이 나를 꼬드겨

가을바람이 나를 꼬드겨

가을이 내게 손짓한다. 따갑게 내리쬐던 여름 햇볕은 가고, 따스하게 감싸는 가을 햇살이 내게 손짓한다. 밖으로 나오라고.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 살랑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짙어진 초록 잎이 나를 부른다. 내게 가을은 유혹의 계절, 자연 속에서 책도 읽고 풍경을 감상하는 그런 매혹적인 계절이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 살갗에 닿는 햇살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플라스틱 수선실 - 1. 망가진 것들

플라스틱 수선실 - 1. 망가진 것들

4256번 로봇이 끌차에 실려 들어왔다. 잔뜩 부서진 발가락에 전선들이 튀어나온 형태가 심각해 보였다. 지철은 마감 팻말을 입구에 던지듯 걸었다. 오늘도 민국은 허락 없이 수선실로 들어왔다.   "뭐야, 오늘 접수된 건 해주는 거죠? 나 4257번인데."  "4256번 부서진 부위가 너무 심해."  "에이, 내 것까지만 해줘요."  "장담

By 이안 -이 안의 숏텐츠
13. 탈주 스캔들 (13) - 그 나이 먹고 꿈이 세계평화

13. 탈주 스캔들 (13) - 그 나이 먹고 꿈이 세계평화

새끼 고앙이를 닮은 아이가 맹랑하게 연애 상담을 해주겠다며 제안을 건네는 모습이라니. 이제 갓 열 살을 넘겼을까 싶은 아이를 내려보던 해진은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그의 키 반절 정도도 안 되는 자그만 몸집의 묘안이 짐짓 자기만 믿으라는 듯 허리를 쭉 편다. 물끄러미 내려보니 아이가 당당하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오래 살진 않았어도

By 가넷베리Garnetberry - 가넷베리의 숏텐츠
이미지 출처 : Photo by Marija Zaric / Unsplash

한로로

두 개의 봄 _ 음악 <벚꽃엔딩>과 <입춘>

지독한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 피부에 닿는 바람이 서늘하다. 해가 지는 시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아, 정말로 가을이 싫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도리어 봄노래가 생각난다.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재생했다. 장범준의 목소리가 진성에서 가성으로 변할 때마다 벚꽃잎이 내 눈앞에 흩날리듯 생생하다. 영상 댓글 창엔 저마다 노래와 관련된 추억을

By 이표(李表) - 표류일지
추억의 재구성

추억의 재구성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을 거야 사실 이보다 멋들어진 말을 찾지는 못했어 이건 모두의 말이야 네가 좋아한다고 너만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늘어진 나뭇가지가 사십 도쯤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 같아 내 가르마와 반대 방향으로 불어대는 바람에 머리칼이 흐트러졌고 나는 슬슬 짜증이 났어 내 이마에 주름이 잔뜩 졌다며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잠시 잊고 지냈던 보통의 날

보통의날

잠시 잊고 지냈던 보통의 날

가족들이 모두 나간 시간, 상자 속 뒤죽박죽 쌓인 더미에서 하나둘 물건을 꺼냈다. 읽고 있던 책, 미술관 전시 정보 책자, 문제집, 이면지, 미술용품 등등… 그중에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작년 이맘때 수묵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팽개쳐둔 겹겹이 쌓인 화선지 꾸러미. 펼쳐본 하얀 한지에는 먹물로 끄적인 짧은 글이 있었다.   오늘은 첫째가 학교 잘 다녀오기를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효율의 역설

효율의 역설

강사가 검사 방법 설명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이미 검사지의 그래프까지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80여 명의 학우들이 모인 수업이니 강사가 검사 방법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고 떠먹여 주듯 각 단계를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검사에 의구심을 가진 건 자가 채점식이라는 점 외에도 주도형, 표출형, 분석형, 우호형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내일이 지워진 세계, 당신의 일상에 연대를

내일이 지워진 세계, 당신의 일상에 연대를

2026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영화 <정거장>  고백하자면 나는 예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고작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난민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얄팍한 이미지뿐.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영화 <정거장>을 보겠다고 자리에 앉았을 때는 물론이고, 영화 속에서 파란 깃발과 주황 깃발로 대표되는 두 세력이 이란 같은 나라의 수니파와 시아파를 상징하는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