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이 귀찮아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탑니다

파국이 귀찮아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탑니다
Photo by Seongho Jang / Unsplash

일곱 살 큰 딸이 태권도 학원에 다닐 때 일이다. 모처럼 승급 심사가 있는 날.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관람하려 체육관 바닥에 앉아 있을 때, 땀내 나는 지하 태권도장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차였다. 편의점 앞에 파라솔과 함께 놓일 법한 플라스틱 의자가 구색 맞추기 용으로 몇 개 놓여있었는데 그 부근에서 소란이 일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딸아이와 유치원을 함께 다니던 남아 한 명이 플라스틱 의자 다리 사이에 목이 낀 채로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난데없는 해프닝에 총각이었던 관장은 허둥지둥 당황하고 사람들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오히려 당사자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숙변을 해결한 사람의 표정이랄까. 의자 다리를 해체했는지 어렵게 빠져나온 아이를 보고 내가 말했다. “야, 너도 크면 나아져. 그런 거 봐도 참을 수 있는 때가 와.” 정작 아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나의 지인이기도 한 그 애 엄마가 알아듣고 웃었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의자 다리 포함, 특정한 공간에 머리를 넣어보고 싶다거나 뜨거울 것 같으면 꼭 손가락 끝이라도 대보고 싶어지는. 조금 더 큰 후에는 지하철 타기를 꺼렸다. 비상 멈춤 손잡이나 벽에 붙은 버튼을 누르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철도안전법 제47조 위반으로 잡혀갈까 봐 두려웠다. 요즘도 가급적, 보다 개별적이고 멀쩡해 보이는 인간으로 존재 가능한 버스를 탄다.
나이가 들면서 파국의 종류는 다양해지고 강도는 심해졌다. 이를테면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앞차를 들이받는 상황을 시뮬레이션 돌려 본다든가. 한강을 바라 보며 물에 뛰어드는 걸 그려본다든가 하는 식이다. 상황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잔상이 오래 남기도 하고, 물리적인 표시를 남기기도 한다. 운전대를 파고든 손톱의 자국, 얼굴에 몰려버린 핏기의 흔적과 터져버린 실핏줄 같은 것들.
실행을 막는 건 한 마디로 ‘세속적인 욕망의 잔존과 귀차니즘의 발현’ 덕분이다. ‘까딱했다간 이 모든 고통이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고통 하나 더 얹는 꼴이 날 수도 있어’와 ‘다 밀어버리고 끝내’의 사이. 결과적으로 파국의 욕망은 매번 패배했고, 그 결과 나는 아직 무사하다. 때로는 내 인생을 파괴하는 것마저 귀찮아질 때도 있다. 나아가 사후세계가 진짜 있으면 더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예감까지. 인간의 상상이란 한계가 없고, 귀차니즘의 세기와 빈도 역시 맺음을 모른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매일의 위기를 넘긴다. 발가락 끝까지 힘을 줘 가속 페달을 밟아버리는 대신 평소라면 하지 않을 쌍욕을 앞 차 꽁무니에 날리고, 강물의 온도가 어떨지 체크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가던 길을 재촉해 귀가한다. 그렇게 내 인생의 파국을 유예하고 돌아온 나는 넷플릭스를 켜고 내가 수습할 필요 없는 타인의 파국을 안전하게 감상한다. 오늘도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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