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구 이후, 문구 : 인벤타리오 2026 문구 페어에 가보니

문방구 이후, 문구 : 인벤타리오 2026 문구 페어에 가보니
ⓒ 2026. Seosai All rights reserve

 삼성동 코엑스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문구페어가 열린다기에 개막 당일 다녀왔다. 사전 티켓이 매진이라 인기를 예상했지만, 현장 체감온도는 그 이상이었다. 줄을 선 채로 발권만 1시간. 기다림 끝에 들어간 내부는 또 다른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일부 인기 브랜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됐는데 대기 시간만 3시간이 넘는 곳도 있었다. 맛집만 줄 서는 거 아니다. 요즘 잘나가는 문구점도 줄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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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맛집이야, 직접 가보지 않으면 그 맛과 분위기를 100% 만끽하기 어렵다. 그러니 줄 서는 수고로움은 견뎌야 할 숙명이다. 하지만 문구는 다르다.  대부분 온라인 구매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가격인가? 10~40%까지 특별할인가라고 내걸었지만, 검색 한번 해보면 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할인가로 구매 가능하다는 걸. 그런데 왜?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집에서 편히 받아보면 될걸, 이 많은 사람들이 굳이 귀찮음과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걸까. 

  그 이유는 현장을 누비며 알게 됐다. 요즘 만년필에 부쩍 관심이 커진 나는 만년필을 직접 시필해보고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공간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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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찾고자 했던 브랜드는 잊고 무심코 줄에 합류했다. 체험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진지했다. 펜촉마다의 필기감을 느끼고, 관심 있는 잉크 색상의 발현 정도를 살피며, 이런저런 색 조합의 바디를 만들어본다. 시연대에 앉는 순간, 주위의 소란스러움은 음소거 된다. 칠흑 같은 암전 속에서 오직 하이라이트 불빛만이 테이블을 비춘다. 

나는 반짝이는 잉크를 좋아하고 

붉은색보다 짙은 푸른색 계열을 좋아하며

굵은 펜보다 가는 펜을 선호한다. 

나는 무채색 바디가 좋다. 

불투명 화이트나, 투명한 바디, 혹은 블랙 또는 그레이.

역시 오늘도 내 취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글리터 색상의 잉크를 골랐고 펜촉은 가늘며, 바디는 투명하면서 반짝이는 것을 선택했다. 이 탐색의 과정 그 자체가 도파민 샘솟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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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건 이 번잡함 속에서도 짜증 섞인 고성 한번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각자 자기의 세계에 빠지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일도 사라진다. 그 후로도 나는 그토록 번잡한 소굴을 떠나지 못했다. 개선장군마냥 돌진해 들어갔다.

다이어리 역시 최대 관심사 중 하나. 다이어리 브랜드들을 살펴보다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사이즈가 작아졌다. 한 손에 딱 잡히는 사이즈의 노트들이 주류를 이룬다. 한동안 1년, 3년, 5년의 만년 다이어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을 함께 하자는 러닝메이트 같은 다이어리들. 그런데 이번 페어엔 만년 다이어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작고 콤팩트한 다이어리들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쓰는 다이어리란 콘셉트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먼 미래를 계획하는 게 아니라 하루를 멋지게 마무리하는 리추얼을 갖고 싶다는 로망. 

매일 밤, 따스한 조명 아래 핸드폰이 아닌 다이어리를 펴고

오늘 하루를 다정하게 닫는 멋진 나의 모습. 

잠들기 전,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일기장. 

다이어리는 이제 더 나올 게 없다고 내 멋대로 한계를 그었다. 그 좁은 생각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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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도구의 세상은 넓고, 도구에 대한 소유욕은 꺼질 수 없다.

계획에 없던 소비로 가방이 절반 쯤 차올랐을 때 그제야 홀린 듯 쓸어담던 행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게 다 뭐람. 언제 이걸 다 주워담았지.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게, 오고가는 사람들의 가방이 다 두둑하다. 그야말로 영리한 미끼다. 영악하다고 하기엔 너무 진심이고 상술이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덕후스럽다. 나는 무엇에 홀렸나. 시연대는 단순히 제품 체험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내가 이 도구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상상하게 만든다. 그 상상의 땔감들이 이곳에 다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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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문방구도 다르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리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던 학교 앞 작은 가게.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한여름이면 파리채를 날리시다, 사탕 한 개를 선물이라고 손바닥에 올려주시곤 했던 곳. 그 시절 문방구는 왜 그렇게 사고 싶은 게 많고. 왜 시간 가는 줄 몰랐는지. 나는 왜 문방구 집 딸로 태어나지 않았나, 태생을 부정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문방구는 내게 특별한 곳이었다. 

그 시절의 문방구는 이제 없지만

문구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사랑받고 있었다. 

인벤타리오 2026이 보여준다. 

당장 손에 넣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던 그날의 도구들은 

그대로 가방 안에 잠들어 있다.

그러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날

그때 비로소 꽃이 되어 책상 위에 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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