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 그날의 공기, 그날의 잔상
연희동 핫플 중 엽서만 파는 가게가 있다. 나지막한 간판을 모르고 지나치기를 여러번. 허름한 건물 3층에 자리한 공간은 웬걸, 제법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위 역세권도, 그렇다고 거창하게 꾸민 공간도 아니다. 좁은 공간에 무려 3천 여종이 넘는 엽서가 진열돼 있다. 작가의 짤막한 설명은 흡사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풍경도 있고 인물도, 애완동물도 있다. 그리고 담백한 문장으로 채워진 엽서도 있다. 감정의 결이 제각각인 엽서들이라, 멈춰서서 하나하나 오래 들여다 본다. 엽서 한 장 고르는 고객들 표정이 사뭇 진지했는데 고객 대부분이 2030세대라는 건 의외였다. 세대를 불문하고 손에 잡히는 기억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걸까.
내가 엽서를 사는 건 주로 여행지에서다. 낯선 공간에서 불쑥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 때 그 순간의 감정과 공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덴 엽서만한 게 없다. 일단 손에 넣기 쉽다. 엽서 없는 기념품샵은 없으니까. 유사한 도구, 편지도 있지만 그날의 공기를 즉각적으로 전달하기엔 부족하다. 하나, 편지는 시각적이지 않다. 기념품샵의 엽서는 대체로 여행지의 절경을 담고 있어서, 공간의 정서를 그대로 전달한다. 둘, 긴문장을 써야한다는 강박이 있다. 종이 한 장을 다채워야 한다는 건 글짓기에 가깝다. 그렇다고 한 장만 쓰기엔 아쉽고 두 장을 쓰기엔 장황하다. 그래서 나는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 때 엽서 한 장을 사서 그날의 감정을 담아 보낸다.

작가생활 10년, 안식년을 갖고 일본행을 택했을 때 나는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엽서로 대신했었다. 다 큰 딸의 외도를 이해해준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 짧은 엽서. 1년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엽서를 거실 오디오 위에서 다시 마주했다. 도쿄 아사쿠사의 풍경 사진은 내가 엄마에게 보냈던 바로 그 엽서였다. 엄마는 내가 없는 시간 동안 그 엽서를 거실 한가운데 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여전히 집에서 함께 숨쉬고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1년 동안 딸을 걱정하고 그리워했을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던가. 그때 알았다. 엽서의 내용은 짧지만 그 잔상은 누군가의 가슴에 꽤 오래 남아, 깊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는 걸.
홋카이도에서 3개월을 보내는 동안 사랑하는 조카에게도 몇장의 엽서를 보냈다. 맞벌이 부부를 대신해 두 번째 엄마처럼 돌본 아이였다. 이모엄마라 부르며 유독 잘 따랐던 아이이기에 멀리 떨어졌을 때 그리움이 유난헀다. 조카가 커서 먼곳으로 이사간 후, 연락은 점점 뜸해졌고 가끔 서운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동생네 집을 찾았을 때, 조카의 책상 위에서 내가 보낸 엽서를 발견했다. 아이가 색이 바랜 엽서를 책상 머리 맡에 달아둔 것이다. 이미 잊힌 기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그 엽서를 보면서 좋은 어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엽서는 감정을 풀어놓을 공간이 제한적이다. 그래서 부담이 없다. 사진이 있으므로 시적인 단 몇줄 만으로도 ‘내가 너에게’ 이 엽서를 보내는 감성이 전달된다. 머뭇거릴 공간이 없으므로 감정의 밀도는 적당히 짙다. 쏟아내는 대신 절제해야하므로 엽서 앞에선 누구나 담백해진다. 솔직하고 생생하게 그날의 감동과 공기가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에 응축된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은 글자 사이에 조용히 남는다. 편지는 낯간지럽지만 엽서는 날것인데도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편지보다 엽서를 더 즐겨쓴다.
엽서는 손에 잡히는 기억이다. 휴대폰 속 사진은 수천 장이지만 엽서는 한 장이다. 누군가에게는 첫 여행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여행은 끝나도 엽서는 남는다. 책상 위에 세워두고, 벽에 붙여두고, 책 사이에 끼워두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엽서는 여행의 기록이라기보다 여행의 잔상과 여운에 더 가깝다. 꼭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 순간의 공기, 기분, 설렘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신기하게도 오래된 엽서를 꺼내 보면 그날의 풍경 보다 그때의 나를 먼저 떠올린다. 내가 엽서를 사랑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