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고려하지 않은 채 대답했던 것 같다. 말투와 태도는 “근데 어쩌라고?”에 가까웠다.
내 대답에 친구는 좀 당황했었노라고 나중에 얘기했다. “근데 그런 반응이어서 오히려 더 편했어.”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웃었던 거 같다. 의도치 않았는데 잘한 거 같아서, 친구가 웃어줘서 좀 기뻤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하다. 주변에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사람도 없던 시절이었다. 책을 많이 읽던 시기도 아니어서 내가 아는 건 1도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그냥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내 머리로 이해하기에 합리적인 세계 안에서 허용가능한 일이긴 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게 뭐. 그런 태도에 지나지 않았다.
후에 친구가 소개한 애인하고 술도 마시고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했다. 친구가 동성 애인하고 겪는 일을 옆에서 보며 알았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이들의 드라마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사랑에 서툰 20대, 어쩌면 첫사랑일지도 모를 그들의 연애 또한 한없이 지질하고 서툰 것이었다.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고 사랑하는 행위 자체에 굶주렸던, 자기 존재의 바닥까지 보이고 마는 것. 사랑의 본질은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정작 친구는 애인의 연애사가 ‘헐리우드의 개들’보다 더 하다며 욕했지만 그 또한 합당한 반응이긴 했다. 그렇게 조금씩 알게 되면서 연애에 관한 내 세계도 넓어진 셈이었다.
그처럼 온 마음을 다해 사람에게 정성을 쏟는 일은 자기의 바닥을 드러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통렬한 과정이 동반되는 일이기도 하고. 그 시절을 통과해 온 우리는 이불킥 할 사건을 떠올리는 동시에 찬란했던 슬픔 또한 기억하고 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 열여섯 살 난 소년의 부모는 아들이 사랑하는 남성과 잘 되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한다. 아름다운 첫사랑에 끝이 있음을 모를 리 없는 현명한 부모는 아들이 받게 될 슬픔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상대의 결혼 소식에 끝을 실감한 소년은 벽난로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소년의 모습 뒤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가족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이고 카메라는 눈물을 흘리는 소년의 얼굴에 초점을 맞춘 채 한참 동안 그대로 있다가 영화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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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사랑의 계절은 지나갔지만 어떤 부모가 될지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은 반드시 온다. 영화에서 엘리오가 겪었던 것처럼 내 아이들에게도 서툰 첫사랑의 열병이 찾아올 테니 말이다. 부디 그것이 나와 친구가 통과해 온 것처럼, 슬프더라도 자기의 온 마음을 다하는 찬란한 실패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