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날개 : 욕망의 흑심

검은 날개 : 욕망의 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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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필,하면 아빠가 떠오른다. 공부 한번 봐준 적 없고, 손톱 한번 깎아준 적 없는 아빠가 유일하게 깎아주신 게 연필이었다. 일요일 저녁, 아빠가 집에 있는 날이면 우리 사형제는 아빠 곁에 두런두런 둘러앉았다. 날짜 지난 신문지 한 장이 촥 펼쳐지면, 제각기 필통에서 연필만 골라 좌르르 쏟아놓는다. 뭉툭해지거나 흑심이 다 닳아버린 연필들. 슥슥슥슥-삭삭삭삭-  소리가 방안에 울리면 나는 아빠 머리맡에 배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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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삭 벗겨지면서 풍기는 나무의 향

툭툭 리듬을 타며 떨어지는 껍질들

쓱쓱 갈리며 쌓이는 검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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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렵하고 말쑥하게 깎인 연필들이 줄을 설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에 설렜다.

아빠가 깎아준 연필은, 선생님이 꼭 알아보셨다. 

‘누가 이렇게 멋지게 깎아주셨니?’ 

‘정말 멋진 아빠가 계시는구나.’ 

나는 선생님의 칭찬이 그렇게 좋았다.

아빠의 성가신 잔소리를 견뎌낼 만큼.

연필을 항상 공짜로 깎아주신 건 아니다. 

“글씨체는 마음이야. 너란 인간이야. 샤프 말고 꼭 연필로 써.” 

아빠는 성적보다 글씨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그깟 글씨가 뭐라고. 

나는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경필대회에서 종종 상을 타는 아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 또박또박 글씨연습을 하던 기억으로 혼돈스러운 순간이면 글씨를 쓰곤 한다. 내용은 대중 없다. 아무말이나 끄적이기도 하고, 읽고 있는 책을 필사하기도 한다. 

또박 또박 글씨를 쓰다보면 뒤엉킨 생각들이 휘발되어 사라진다. 

도구에 따라 마음의 결도 달라진다.

요즘 내가 사랑하는 글친구는 ‘검은 날개’란 이름의 연필.

침묵으로 자신의 존재를 말하는 도구는 얼마나 멋진가.

오랜 역사, 품격, 자신감, 장인정신, 압도적 지위, 고요한 사치 등등  

거창한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내 촉수를 건드린 건 존 스타인벡의 한마디였다.

“지금껏 써본 것 중 최고다. 물론 세 배나 비싸지만,”

존 스타인벡은 검은 날개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것도 매일 아침 24자루를 바늘처럼 날카롭게 깎아 한 컵에 세워두고 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존 스타인벡이 연필을 깎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아빠의 모습이 겹쳤다. 연필을 깎는 데 몰두해 있던 무감한 표정, 그 표정 너머, 아빠는 어떤 꿈을 꾸고 계셨던 걸까. 

검은 날개는 아빠를 닮았다.

세상에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존재

자신의 책임을 다한 존재만이 가진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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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날개가 사랑받는 이유는 진하고 부드러운 흑연이다. 흑연이 진하면 글씨를 쓴다는 시각적 만족감이 다르다. 생각이 정리되어 문자로 확연히 새겨지는 느낌은 글을 쓰는 동력이 된다. 틀려도 된다는 감각에 힘입어 생각은 더 과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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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lf the pressure, twice the speed’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속도를 낸다는 이 오래된 광고문구는 연필의 물성이라기보다 인생의 철학처럼 들린다.

 

힘을 빼되 더 멀리

저항하지 않되 더 깊이 

무르지만 단호하고 번지지만 선명하게 

검은 날개는 도약을 위해 난다기보다 종이 위를 선회하는 블랙이글이다. 언제든 쓸 수 있고 언제든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이 용기를 부추긴다. 

검은 날개를 손가락에 쥘 때마다 최면을 건다. 

내 생각만이 특별하다는 유별난 감각을 불러낸다. 

이 생애엔 아무래도 그른 것 같지만 

멋진 문장을 쓰고 싶은 꺼지지 않는 욕망과 

대문호로 살고 싶은 환상 속에 나를 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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