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을 선호하고
넘길 때 힘없이 팔랑이는 것보다 적당한 힘으로 버티며 넘어갈 정도의 종이 두께를 좋아한다.
반으로 펼쳤을 때 편편하게 펼쳐져야 메모하기 편하다.
펼침성은 링제본이 가장 좋지만, 이 링은 때때로 손에 걸려 불편하다.
인공적인 냄새를 풍기는 노트는 탈락이다.
곁에 가까이 두어야 하는데 악취를 풍기면 곤란하다.
코끝에 종이 본연의 향이 닿아야 한다.
가공되지 않은, 그냥 종이의 냄새. 나는 그게 좋다.

특별히 신중하게 노트를 고르는 그 시간을 사랑한다.
무엇도 채워지지 않은 텅 빈 노트는 글자 대신 가능성으로 채워진 밥통이다.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새 노트를 펼칠 때의 그 흥분되는 기분이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한 권을 다 채우면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나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가능성이 없는 내일은 얼마나 암울한가.
가능성이란 내일의 삶을 꿈꾸고 기대하게 만들어, 오늘은 살게 하는 삶의 이유다.
그래서 수첩은 밥이다.

노트 대신 태블릿PC의 메모 앱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얼리어답터인 양 뽐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일단 무게 때문이었다.
새 노트로 바꿔 외출한 날이면 꼭 이전 노트에 적어두었던 아이디어며 취재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했던 기억. 태블릿이라면 해결될 줄 알았다.
확실히 무한대로 저장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이다.
태블릿PC는 배부른 척을 잘했다.
무한대로 생각을 먹었지만 내 배는 허했다.
사과연필이 지나간 자리엔 저항이 없어 쓰는 재미를 잃었고 저항이 없으면 생각이 정제되기도 전에 그냥 쏟아져 버렸다.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쏟아진 것들은 남지 않았다.
밥이 아니라 링거 같달까. 좋은 건 알겠는데 언제나 배가 고프다.

새 수첩을 사면 첫 페이지를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망설여진다. 첫 장은 공백으로 남겨두고 둘째 장부터 써야 할지, 인상 깊은 문구 하나를 적어두고 매일의 각오로 삼을지. 보이지 않는 줄에 맞춰 쓸지, 아니면 마구 휘갈겨 쓸지. 노트는 정리된 세계가 아니다. 완결된 기록도 아니고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말이 되기 직전의 순간, 생각이 인간의 뇌에서 태어나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시간. 나는 잘 쓴 문장보다 쓰다만 문장을 더 애착한다. 닫히지 않은 애매한 낙서. 적확하지 않아 유추할 수밖에 없는 단어들. 왜 이렇게 적었을까 싶은 것들. 지금의 나는 쓰지 않을 것들.
잊힌 이름.
끝난 걱정.
한참 후에 보면 그런 것들이 가장 진실되고 오래 나를 설명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오늘도 수첩을 산다.
아직 반도 채우지 않은 것이 가방 안에 있는데도.
그게 탐욕인지 습관인지 잘 모르겠다.

새 수첩을 들고나온 날은 이상하게 배가 부르다.
수첩은 밥이다.
먹어야 사는 것,
자꾸 생각나는 것,
없으면 조금 허기지는 것.
그래서 아직 비닐을 뜯지 않은 노트가 있는데도
또 다른 노트를 찾아 헤맨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여전히 허기진 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