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담은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친구들에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자마자 부끄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필명도 밝히고 책 제목과 연재처 링크를 공유했지만, 어떤 무리에게는 주저했다.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꺼내려던 마음과 달리, ‘사실은,’ 같은 호흡을 넣어 무려 ‘선언’을 해버렸다는 점은 같았다. 유난스러운 나의 성격을 인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히 네가?’ 같은 속엣말을 추측하는 내가 싫었다. 개중 가장 솔직한 이유는 더 이상 실패담을 공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했다고 선언해 놓고 중간에 그만뒀다거나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치 있는 실패담은 훗날 성공이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패담을 공유한다. 면접을 처참하게 망쳐버린 이야기, 직장에서 권고사직 당한 이야기,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이야기, 사랑에 실패한 이야기. 진심이 담길수록 좋다. 누군가 먼저 자신의 실패담을 꺼내 보이면, 나는 성실하게 갚아준다. 상대가 어렵게 꺼낸 친교의 신호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 진심이 아니라면 그를 배신하는 것만 같다. 때로는 나의 진심 어린 실패담을 꺼내게 만든 상대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와 깊게 사귈 생각이 없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누가 더 실패했는가를 말하는 것은 일종의 중독이다. 울고 싶어서 일부러 슬픈 영화를 찾아보는 것처럼, 남의 실패담에 내 것을 얹어 누가 누가 더 실패한 삶인가 나누기도 한다. 익명의 커뮤니티에 답 없는 상황을 토로하고, 불행 속에 머문 채로 끝나는 소설과 영화를 찾아본다. 분명 찝찝하고 허망한 기분이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후련하다. 남들도 똑같이 살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일까. 그런 일차원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한 작가의 북토크에 참여했다. 작가는 사뮈엘 베케트의 문장을 인용했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멋지게 실패하라.
'실패'는 '다시 하라'는 말로 멋지게 정의되었고, "서른이란 나이는 실패할 수 없다. 시도할 수 있다."라는 말이 마음을 울렸다. 이런 말의 힘은 성공한 작가에게서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 뒤에 들었다.
정확히는 볼펜똥을 싫어한다. 그 시커멓고 끈적한 덩어리. 방심한 순간, 손날과 노트를 까맣게 더럽히는 그것. 글쓰기에 몰두하려는 찰나, 어김없이 펜 끝에 맺혀, 깔끔하게 닦아내지 못한 변처럼 꺼림직함을 유발하는 그것.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그것. 볼펜을 들때마다 심장이 조인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쥔 것처럼.
내 첫 볼펜은 그 유명한 모나미153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볼펜이자 세대불문 모르면 간첩이라는 그 물건. 무엇보다 가격이 착하고, 내구성이 훌륭할 뿐 아니라 잉크는 질리게 오래간다. 또한, 다 써도 버릴 데가 없다. 모나미153는 볼펜계의 돼지다. 볼펜의 펜대만 분리해 몽당연필을 끼워쓰거나, 뚜껑에 물풍선을 달아 물총놀이를 하기도 하고, 분해해서 장난감 볼펜총을 만들어 놀기도 했다. 끝까지 쓸모를 다 하는 존재감.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펜똥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고, 용서가 안된다.
문제는 내가 입으로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결국 손에 볼펜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도구는 필요에 의해 탄생한다.
볼펜이 세상에 등장한 건 무려 1938년의 일이다. 헝가리 신문 기자였던 라슬로 비로는 취재할 때마다 만년필의 불편함이 불만이었다. 그러던 중 거리에서 굴러가던 공 하나가 그에게 답을 주었다. 진흙 묻은 공이 굴러가며 남긴 긴 선. 볼 베어링과 점성 있는 잉크를 조합한 볼펜은 그렇게 탄생했다. 만년필처럼 잉크를 자주 채울 필요가 없고, 번지지 않으며, 휴대하기 편한 실용적인 필기구의 등장. 쉽게 지워지지 않는 펜이 등장하자, 가슴팍 주머니에 누구나 펜하나씩 꽂고 다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긴 분명히 우주인데, 내 눈앞에 유영하는 저 유모차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뒤집혀 흐르는 유모차를 봤지만 못 본 척한다. 커피로 열지 못한 아침이란, 내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니. 저리 흐르게 둔다. 나는 아직 수면 상태이다. 그래야만 한다. 저것은 지금까지 둥실거렸으니, 조금 더 둥실거린다고 지구가 파괴되진 않을 것이다.
나는 클린 스페이스 본사의 잔해 처리반 직원이다. 우주를 정복 하겠다고 인간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구 못지않게 우주도 인간들의 쓰레기로 골치가 아프다. 우리는 인간들이 만들어 우주를 그리고 지구를, 결국엔 인간을 공격하게 된 쓰레기를 수거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회사의 직무가 그럴듯하지만, 우린 그냥 우주 환경미화원이다.
우주 소속도 정부 소속도 아닌 사설업체가 나름 공익을 실현한다며 광고하는 통에 지원자가 부쩍 많아졌다. 우주를 아직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직함에 우주가 포함된 것만으로 매력적인 직업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신입사원들은 더럽고 오래된 쓰레기를 마주하고 나면 거의 90퍼센트는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마주해야 할 쓰레기는 우주선 폐기물 따위의 고철뿐만 아니라 우주에서 분해 되지 못하고 떠도는 시체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버려진 우주선 안에 생명체가 있는 건 더 위험한 상황이다.
어떤 이에게는 징징거리느라 울상인 얼굴로 어떤 이에게는 정신 놓고 웃는 주름진 얼굴로 어떤 이에게는 세상 이야기로 미간에 내 천(川)자를 그린 얼굴로 어떤 이에게는 책임감 가득한 다부진 얼굴로 어떤 이에게는 눈동자에 힘 잔뜩 빼고 멍한 얼굴로 어떤 이에게는 빛이 반짝반짝 배움 가득한 눈동자로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 했다. 그럼 회피하는 기술은 어떤가. 그 또한 신이 인간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 준 것일까. 신의 선물이든, 생존하기 위한 뇌의 작용이든 하루치의 안정을 위해 나라는 인간이 선택하는 방식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다. 내가 지금 조선시대로 타임슬립이라도 하게 된 건가. 당치 않은 놈들에게 맞지 않는 권력을 쥐어주니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다른 나라에 대한 주권 침탈과 전쟁을 빙자한 사적 재산 축재의 현장, 제노사이드.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전부터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팔레스타인 청년 바셀 아드라의 <노 어더 랜드>는 서안지구 마사페르 야타에서 자행된 강제 이주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스라엘이 군사 훈련장으로 쓴다며 마을을 무참히 짓밟고 항의하는 청년에게 그 자리에서 총을 쏘는 장면은 그 어떤 영화보다 공포스러웠다. 제노사이드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역겨운 일도 없을 것 같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픽션이 아니라는 것보다 놀라운 건 대체 저들은 매일 먹을거리를 어떻게 구하는가다. 그런데 그 안에 가족 간의 사랑이 있고, 우정도 있다는 점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징그럽다. 인간의 생존이란 이토록 질긴 것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없이 하찮아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마주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