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예의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 했다. 그럼 회피하는 기술은 어떤가. 그 또한 신이 인간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 준 것일까. 신의 선물이든, 생존하기 위한 뇌의 작용이든 하루치의 안정을 위해 나라는 인간이 선택하는 방식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다. 내가 지금 조선시대로 타임슬립이라도 하게 된 건가. 당치 않은 놈들에게 맞지 않는 권력을 쥐어주니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다른 나라에 대한 주권 침탈과 전쟁을 빙자한 사적 재산 축재의 현장, 제노사이드.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전부터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팔레스타인 청년 바셀 아드라의 <노 어더 랜드>는 서안지구 마사페르 야타에서 자행된 강제 이주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스라엘이 군사 훈련장으로 쓴다며 마을을 무참히 짓밟고 항의하는 청년에게 그 자리에서 총을 쏘는 장면은 그 어떤 영화보다 공포스러웠다.
제노사이드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걸 지켜보는 것만큼 역겨운 일도 없을 것 같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이 픽션이 아니라는 것보다 놀라운 건 대체 저들은 매일 먹을거리를 어떻게 구하는가다. 그런데 그 안에 가족 간의 사랑이 있고, 우정도 있다는 점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징그럽다. 인간의 생존이란 이토록 질긴 것이면서도 또 때로는 한없이 하찮아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마주한단 말인가.
가끔은 이런 일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냥 눈감고 싶어진다. 일일이 다 알고자 참견하기 시작하면 무엇보다 마음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입에 들어가는 밥 한 톨을 그냥 넘길 수가 없게 된다.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절감하게 되는 어떤 날에는 방 밖을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질 위험도 있다. 그래봐야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란 인간의 쓸모없음을 통감할 뿐이지만. 나와 타인의 무심함에 마음으로 칼날이 스치는 기분을 더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런 고통이 달가울 리 없으니 회피하는 기술만 점점 늘어간다. 살기 위한 발명품이라고 하지만 이렇게라도 살아있는 것이 구차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질 때가 있다. 우스운 건 내일은 다시 명랑해진다는 것. 평생을 반복해 온 일이니 모를 리가 없다. 나는 또 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웃을 것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이런 망각과 회피를, 나이 들어 현명해진 대처라고 포장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다. 더러운 게 있다면 더럽다고 말하고 싶고, 지긋지긋한 게 있으면 지겨워 죽겠다고 말했으면 하는 거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