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전하는 글진 geulzine의 뉴스레터 0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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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주었다. 따뜻한 벽난로를 등지고서도, 해서 내 마음은 한 장의 손수건처럼 자꾸만 젖어들었다. 젖고, 젖었으며... 내가 젖을수록 조금씩 말라가는 그녀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마르고 따뜻해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나는 그녀의 고통을 흡수해주고 싶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위즈덤하우스, p.15.
지하철에서 여자가 운다. 두 사람의 유일한 우군이자 증인이었던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고 그 병문안을 다녀온 길이었다. 소리 내 우는 여자를 남자는 두어 번 달래다 빽 소리를 지른다. “그만 좀 울어”라고.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커플(여자가 엄청 못 생겼다)이니 남자의 고함소리에 지하철 안 사람들이 그들을 주시한다. 남자가 견디지 못한 것은 여자의 눈물이었을까, 사람들의 시선이었을까. 두 인용문의 ‘남자’는 놀랍게도 같은 남자다. 캐릭터이긴 하지만.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남자와 영화 <파반느>의 남자는 여자의 눈물이라는 비슷한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글이 시각화된 결과로 보기에, 이 간극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정도의 변화다. 치명적인 훼손이다. 소설에 열광했던 독자들이 얼마 전 공개된 영화 <파반느>에 실망하는 경우는 바로 이 차이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우는 여자 친구를 참을 수 없는 남자가, 심하게 못생겨서 인생이 피곤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건 단순히 호기심의 발로일까, 아니면 그것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관계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끼어들 개연성이 가능한가 싶은 거다. by 윤명주_사적인 지각 변동 | |
여기 두 문장이 있습니다. "그의 문학은 나이로 치면 30대 중년여자, 피부로 치면 육욕에 거친, 지방질은 거의 다 말라 없어진 퇴폐하고 황량한 피부." 그리고 같은 작가를 두고 쓰인 또 다른 문장이 있습니다. "교훈 같은 흔적은 조금도 없으면서도, 자미있고, 그 자미가 결코 비열하지 않은 — 고상한 자미." 전혀 다른 평가입니다. 하나는 평론을 빙자하며 작가의 몸을 겨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작품 자체를 읽고 있습니다. 두 문장이 향하는 사람은 김명순입니다. 필명은 탄실. 1896년생.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여성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시집을 발간했고, 수필,소설,번역을 넘나들며 기자와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1917년, 그는 『청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며 문단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때 심사위원 이광수는 김명순의 문학에 대해 고상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데뷔 이후 남성 중심의 문단은 그것과 상반된 공격을 그에게 퍼붓습니다. by 마침 | |

“아니, 그게요. 남 형사님은…….” 그동안 되게 주 간수를 거슬려 하시는 것 같길래, 뭐라 작게 우물쭈물하는 팀원에게 눈을 부라린 의일은 뭐라고 더 말 섞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들 앞에서 푸른 빛을 뿜는 관제탑 모니터 안에서 붉게 깜빡이는 인하 일행의 현 위치를 노려봤다. 그러다 그는 유독 새카맣게 때가 탄 부분을 발견했다. 얼룩인 줄 알고 손으로 지워보려 했으나 몇 번을 문질러도 검은 자국이 잘 빠지지 않았다. “솔직히, 거슬리긴 해.”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삼킨 속이 끓었다. 의일은 담배를 꺼내 물었고, 옆에서 뭐라 했다. “아니, 여기 금연인데요.” “시끄러워, 좀 냅둬요…….” 이 끔찍한 건 자기혐오일까. 못해도 그 언저리 즈음에 있는 무언가였다. 간절히 바라는 걸 얻으려다 그만 좌절하면, 인간이 얼마나 바닥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의일은 잘 알았다. 그래서 괜히 뭐라도 아는 척, 어디선가 들어본 걸로 스스로를 한가득 치장해봤다. by 가넷베리_가넷베리의 숏텐츠 
문구점에 갔다가 형형색색의 클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당근, 기타, 선인장, 왕관, 음표, 악어 등 앙증맞고 귀여운 클립들이 꼬리를 흔든다. 딱히 쓸 곳을 정하지 않고 책상 위에 들였는데 의외로 쓰임새가 많다. 두어 개는 다이어리에 꽂아 책갈피로 쓰고 어떤 건 네컷 사진을 끼워 책상 맡에 걸어 두었다. 또 어떤 건 고지서를 묶어두는 데 썼다. 볼 때마다 귀여워서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런 디자인클립이 더 일찍 나왔더라면 고단했던 생방송 아침이 조금은 달랐을까.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MC와 리포터의 원고를 스테이플러로 찍고 있던 내게 선배가 말했다. “원고는 스테이플러 말고 클립으로.” 처음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선배의 사소한 취향 정도로 어림짐작했다. 하지만 몇 번의 생방송을 거치면서, 클립에겐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스테이플러는 원고를 단단하게 고정한다. 대신 종이를 펄럭이며 넘겨야 하고, 그 소리가 마이크에 잡혀 소음이 된다. MORE>>>
by 김지혜_4등을 위한 글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선생님,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아이들은 충분히 울고 나서야 비로소 이 질문을 꺼낸다. 상실을 인정했고, 잃어버린 것들을 위해 마음껏 울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실의 감정 속에 머문다. 상담실에서 만난 한 아이는 친구를 잃은 상실감 속에 몇 달째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선생님, 이 슬픔이 끝날 것 같지 않아요.” “슬픔이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없어요.” 슬픔이 끝나야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다. 진정한 애도는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완성된다. 물론, 상실에 대한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머무를 시간은 필요하다. 그러나 평생 그곳에만 머물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상실의 자리를 남겨둔 채로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시점이 찾아온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머뭇거린다. 완벽한 회복을 기다리거나, 방법을 몰라 멈추기도 한다. 혹은, 다시 웃는 일상이 배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기도 한다. 하지만 상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나 완전한 회복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상실의 자리를 남겨둔 채 오늘의 소소한 일들을 해보는 것이다. <더 보기>
by 이지선_햇살 좋은 창가 무언가를 갖고 싶은 소비 욕구가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책을 사거나 빌린다. 책을 펼치고 앉아 있으면 괜히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군가에게 “내 취미는 책 읽기예요.”라고 말할 때도 조금은 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좋다. 베스트셀러나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을 굳이 고르지는 않는다. 그저 내 삶에 닿는 책을 조용히 골라 읽는다. 그러다 보면 흩어져 있던 생각이 조금씩 자리를 잡고, 내 마음이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책은 어느 순간 곁에 머무는 동반자가 된다. 읽을 때마다 다른 삶을 만나고, 어딘가 닮아 있는 마음을 발견하며 묘한 동지애를 느끼기도 한다. 특히 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삶에 지칠 때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작은 틈 같은 시간. 그림과 짧은 문장이 나를 조용히 안아준다. 그 품 안에서 잠시 울다가, 다시 웃게 된다. 위로받기도 한다. 그렇게 책은 무언가를 채우고 싶던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 준다. <더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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