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주었다. 따뜻한 벽난로를 등지고서도, 해서 내 마음은 한 장의 손수건처럼 자꾸만 젖어들었다. 젖고, 젖었으며... 내가 젖을수록 조금씩 말라가는 그녀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마르고 따뜻해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나는 그녀의 고통을 흡수해주고 싶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위즈덤하우스, p.15.
지하철에서 여자가 운다. 두 사람의 유일한 우군이자 증인이었던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고 그 병문안을 다녀온 길이었다. 소리 내 우는 여자를 남자는 두어 번 달래다 빽 소리를 지른다. “그만 좀 울어”라고.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커플(여자가 엄청 못 생겼다)이니 남자의 고함소리에 지하철 안 사람들이 그들을 주시한다. 남자가 견디지 못한 것은 여자의 눈물이었을까, 사람들의 시선이었을까.
두 인용문의 ‘남자’는 놀랍게도 같은 남자다. 캐릭터이긴 하지만.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남자와 영화 <파반느>의 남자는 여자의 눈물이라는 비슷한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글이 시각화된 결과로 보기에, 이 간극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정도의 변화다. 치명적인 훼손이다. 소설에 열광했던 독자들이 얼마 전 공개된 영화 <파반느>에 실망하는 경우는 바로 이 차이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우는 여자 친구를 참을 수 없는 남자가, 심하게 못생겨서 인생이 피곤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건 단순히 호기심의 발로일까, 아니면 그것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관계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끼어들 개연성이 가능한가 싶은 거다.
"그의 문학은 나이로 치면 30대 중년여자, 피부로 치면 육욕에 거친, 지방질은 거의 다 말라 없어진 퇴폐하고 황량한 피부."
그리고 같은 작가를 두고 쓰인 또 다른 문장이 있습니다.
"교훈 같은 흔적은 조금도 없으면서도, 자미있고, 그 자미가 결코 비열하지 않은 — 고상한 자미."
전혀 다른 평가입니다. 하나는 평론을 빙자하며 작가의 몸을 겨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작품 자체를 읽고 있습니다. 두 문장이 향하는 사람은 김명순입니다. 필명은 탄실. 1896년생.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여성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시집을 발간했고, 수필,소설,번역을 넘나들며 기자와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1917년, 그는 『청춘』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며 문단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때 심사위원 이광수는 김명순의 문학에 대해 고상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데뷔 이후 남성 중심의 문단은 그것과 상반된 공격을 그에게 퍼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