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밀도에 대하여
“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주었다. 따뜻한 벽난로를 등지고서도, 해서 내 마음은 한 장의 손수건처럼 자꾸만 젖어들었다. 젖고, 젖었으며... 내가 젖을수록 조금씩 말라가는 그녀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마르고 따뜻해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나는 그녀의 고통을 흡수해주고 싶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위즈덤하우스, p.15.
지하철에서 여자가 운다. 두 사람의 유일한 우군이자 증인이었던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고 그 병문안을 다녀온 길이었다. 소리 내 우는 여자를 남자는 두어 번 달래다 빽 소리를 지른다. “그만 좀 울어”라고.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커플(여자가 엄청 못 생겼다)이니 남자의 고함소리에 지하철 안 사람들이 그들을 주시한다. 남자가 견디지 못한 것은 여자의 눈물이었을까, 사람들의 시선이었을까.
두 인용문의 ‘남자’는 놀랍게도 같은 남자다. 캐릭터이긴 하지만.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남자와 영화 <파반느>의 남자는 여자의 눈물이라는 비슷한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글이 시각화된 결과로 보기에, 이 간극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정도의 변화다. 치명적인 훼손이다.
소설에 열광했던 독자들이 얼마 전 공개된 영화 <파반느>에 실망하는 경우는 바로 이 차이 때문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우는 여자 친구를 참을 수 없는 남자가, 심하게 못생겨서 인생이 피곤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건 단순히 호기심의 발로일까, 아니면 그것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관계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끼어들 개연성이 가능한가 싶은 거다.
그런 장벽을 뚫고 사랑에 빠진다는 건 적어도 내게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사랑이 판타지의 영역이 아니라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이 문제는 소설과 영화의 꽤 중요한 바탕이다. 삶이 고달플 정도로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그랬지만 영화는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 운영에서 길을 잃었다. 그토록 납작한 캐릭터가 전개하는 깊고 깊은 사랑의 밀도라니 어쩐지 공허하게만 보였다.

진짜 사랑이 뭔지 잘 모르지만 비겁함이나 타인의 고통 회피와 같은 선상에 사랑이 놓이지 못할 거라는 점은 안다. 사랑이 섣부른 위로나 해결책 제시가 아닌 것처럼. 타인의 슬픔 밑바닥에 도달해 기꺼이 눅눅해질 수 있는 것이 내가 아는 한 진짜 사랑이다. 그 지독한 기다림과 흡수의 과정만이 사랑의 밀도를 결정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어진다.
아무리 새파란 청춘의 이야기인들 그 깊이가 얕기만 하겠는가. 적어도 내가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으면서 느꼈던 청춘의 깊이는 얄팍하지 않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긴 한데.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런 사랑을 했기에 평생 빛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 건지. 알 수 없다.
사랑을 통해 내면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일은 타인의 시선이나 잣대에 관계를 위치시킬 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소설에서 배웠다. 가장 눅눅하고 고통스러운 밑바닥에 기꺼이 함께 하려는 마음이야말로 관계의 밀도를 정하는 것. 사랑을 정의하는 일은 언감생심 능력 밖의 일이지만 다만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나는 누군가의 눈물 밑에 깔아줄 마음 한 장 펼쳐본 적이 있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