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여자가 있습니다. 한 명은 칼을 쥐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옆에서 힘을 보탭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도, 망설임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숨 막히는 집중만 있을 뿐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장면(Judith Slaying Holofernes)〉입니다.
유딧은 적장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같은 성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많습니다. 하지만 남성 화가들이 그린 유딧은 어딘가 연약해 보입니다. 피가 튀길까 봐 몸을 뒤로 빼고 얼굴을 찡그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갸냘픈 주체가 참혹한 과업을 완수한다는 대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연약함 때문에 극적효과는 배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승리의 서사에서도 여성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은 왜곡된 여성상을 고착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아르테미시아의 유딧은 다릅니다. 처음부터 이 일을 완수할 사람처럼 강인한 투지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하녀 아브라 역시 단순한 조력자가 아닙니다. 물러서지 않고 함께 몸을 기울여 기꺼이 힘을 보탭니다. 미술사학자 메리 개러드는 바로 이 지점을 짚었습니다. 아브라는 단순한 배경 인물이 아니라, 여성들의 연대가 화면 안에서 가시화된 존재라고요. 여성과 하녀라는 계급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오직 독립된 주체로서 맞닿은 이들의 연대라니,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뜨거운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벌써 십수 년 전 이야기다. 종로3가 낙원상가 앞, 손수레 행상이 즐비하던 거리에서 만난 수제 노트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빳빳한 표지가 먼저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속지를 보호하지 못하는 표지를 싫어한다.- 갱지 느낌의 속지를 만지작거리다 코를 대보니 진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1만 원짜리 지폐를 기꺼이 꺼내 들었다. 직접 쓰면서 만족도는 배가 되었다. 제일 좋았던 건 필기감. 연필을 대면 서걱서걱 쓰는 맛을 느끼게 하는 소리, 펜을 대면 또렷하게 스며들면서도 퍼지지 않는 선명함, 그리고 눈이 피로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색감까지.
여러 권을 취재 노트로 썼지만, 마지막 한 권은 절반만 쓴 채 책장에 꽂혀 있다.
손수레 행상이 사라진 뒤로 다시는 그 느낌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혹은 언젠가 이와 비슷한 노트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 그 노트를 다시 꺼낸 날, 나는 비슷한 종이를 찾아 한 종이 회사의 오프라인 매장으로 향했다.
세상에 쓰이는 종이만 만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색상별로 따지면 수만 종이 넘는다. 우리가 흔히 ‘흰 종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울트라 화이트, 내추럴 화이트, 크림 화이트, 화이트 등 미묘한 차이로 분류된다. 표면이 매끈매끈한 코팅지부터 광택이 도는 아트지, 손끝에 요철이 느껴지는 거친 코튼지까지. 두께 역시 살랑이는 얇은 것부터 잘 접히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것까지, 전문 용어로 지종, 평량, 색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더 보기>
고등어조림이 뚝배기 위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내가 생선 가시와 씨름하는 동안 앞에서는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짜고 벌인 전쟁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함께 강습을 듣는 사이였다.
“일부러 분유 공장 같은 데만 골라서 공격했다잖아.”
“선생님, 그거 어디서 봤어요? 아무리 트럼프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미국이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야. 미국 사람들 프로테스트 하는 거 보세요. 유튜브에서 이상한 거 보면 안 돼. SBS나 KBS 같은 걸 봐야지.”
뜻밖의 일갈에 당황했는지 내 앞에 앉은 이는 조용히 “나중엔 다 진짜로 판명 나더라”며 입을 비죽거리며 알탕 속 동태알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나는 말없이 동태알이 그의 입안에서 터지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가 음미하는 것은 동태알 터지는 식감일까. 알을 터트리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학교가 공립이었어, 사립이었어?”
알탕에 집중하던 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유학갔을 때 학생들이 선생 앞에서 키스하는 모습에 당황했다는 이야기에 대한 질문이라기엔 뼈가 있었다. 나는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무조림을 혀로 뭉개고 있었다. 이제는 저 사람의 공격 타이밍이군. 조림 때문인지 흥미진진한 상황 때문인지 모를, 입안에 침이 돌았다. 답하는 사람도 질문하는 사람도 모두가 아는 귀결. 상대가 망설이며 “공립”이라고 답하는 순간 1초도 안 돼 대꾸가 튀어나왔다.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