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 천 가지 얼굴 - 나는 무엇으로 남을까.

종이 : 천 가지 얼굴 - 나는 무엇으로 남을까.
ⓒ 2026. Seosai All rights reserved.

소중해서 기록하기를 멈춘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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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십수 년 전 이야기다. 종로3가 낙원상가 앞, 손수레 행상이 즐비하던 거리에서 만난 수제 노트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빳빳한 표지가 먼저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속지를 보호하지 못하는 표지를 싫어한다.- 갱지 느낌의 속지를 만지작거리다 코를 대보니 진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1만 원짜리 지폐를 기꺼이 꺼내 들었다. 직접 쓰면서 만족도는 배가 되었다. 제일 좋았던 건 필기감. 연필을 대면 서걱서걱 쓰는 맛을 느끼게 하는 소리, 펜을 대면 또렷하게 스며들면서도 퍼지지 않는 선명함, 그리고 눈이 피로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색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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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권을 취재 노트로 썼지만, 마지막 한 권은 절반만 쓴 채 책장에 꽂혀 있다.

손수레 행상이 사라진 뒤로 다시는 그 느낌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혹은 언젠가 이와 비슷한 노트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 그 노트를 다시 꺼낸 날, 나는 비슷한 종이를 찾아 한 종이 회사의 오프라인 매장으로 향했다. 

세상에 쓰이는 종이만 만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색상별로 따지면 수만 종이 넘는다. 우리가 흔히 ‘흰 종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울트라 화이트, 내추럴 화이트, 크림 화이트, 화이트 등 미묘한 차이로 분류된다. 표면이 매끈매끈한 코팅지부터 광택이 도는 아트지, 손끝에 요철이 느껴지는 거친 코튼지까지. 두께 역시 살랑이는 얇은 것부터 잘 접히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것까지, 전문 용어로 지종, 평량, 색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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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묘한 차이는 ‘쓰임’과 깊이 관계 있다. 글을 쓰는 도구로서 종이를 보자면, 필기구와의 궁합에 따라 그 종이가 보여주는 얼굴과 가치는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종이는 만년필 잉크를 떠안은 듯 부드럽게 머금고, 어떤 종이는 연필심을 스스로 받아주며 친숙하고 안정감 있는 소리를 낸다. 또 어떤 종이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매끄럽다가도, 잉크가 스미는 순간, 전혀 다른 표정으로 반긴다. 

나는 그날 매장에서 수십 종의 종이를 만져보고 취향에 맞는 몇 가지를 골라 왔다. 

그 종이를 잘라 다양한 필기구로 필사를 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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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종이 같지 않은가.

극히 일부를 알면서, 전부를 아는 것처럼 살아온 건 아닐까.

인간은 한두 가지 유형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파악할 때 A, B, O, AB 혈액형 혹은 INFP, ESTJ 같은 MBTI로 인간 유형을 가르고,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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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쌍둥이조차 지문 하나, 유전자 하나가 다르듯, 세상에 똑같은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어떤 이는 토모에리버처럼 부드럽게 이야기를 받아주고, 어떤 이는 반누보처럼 상대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빛내준다. 또 어떤 이는 두꺼운 분펠처럼 꾸밈없는 모습으로 편안함과 신뢰감을 주기도 한다.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못 박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진짜 질감을 놓쳐버린다. 종이를 고를 때처럼, 사람을 만날 때도 “이 사람은 지금, 어떤 감촉으로 내 이야기를 받아줄까?”, 여유를 가지고 느리게 다가가고 싶다.

어떤 이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받아주고, 어떤 이는 거칠게 밀어내다가도 진지하게 나를 물들인다. 또 어떤 이는 단단하게 버텨주며 경계를 만들어준다.

다름은 ‘예외’가 아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존중하고,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그리고 책꽂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지언정 

잊히지 않을 나만의 질감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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