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심. 질식해도 좋을
넌 늘 물을 찾았어 네 좁은 목구멍을 모르고 미어지게 밀어 넣은 나만의 진심에 가슴을 쳤지 뽀얀 살결 속 서슬 푸른 비수를 숨긴 이들처럼 나마저 독을 품었다면 너는 나를 달리 대했을까 무해하다는 이유로 파헤쳐도 좋을 이름이 된 나, 못난 침묵이라 하지 말기를 자줏빛 수의를 입고 어둠 속에서 견딘 시간은 지상의 설탕을 빚어내는 달콤한 농축이며 마침내 네 허기를 채울 나의, 가장 뜨거운 온기이니 by 마침_시필 | |
인생의 갈림길이 많아질수록,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같은 후회가 많아진다. 더군다나 그 선택이 다른 사람의 설득 때문이라면 후회는 원망으로 바뀐다. 나에게는 그것이 제주행이었다. 몇 년 전 나는, 쉼 없이 일했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작은 규모의 직장이었기에, 내가 발전하는 만큼 함께 성장하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그게 재밌어서 힘든 줄도 몰랐다. 그렇게 3년을 매진하고, 문득 번아웃이 찾아왔다. 그러자, 내 앞엔 선택지가 놓였다. 서울에서 치열하게 경쟁하여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할 것인가, 비슷한 업무 환경이지만 조금 더 여유로운 제주도로 향할 것인가. 나는 제주로 향하기로 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고, 조금은 여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결심을 가족에게 선언하자, 엄마는 말했다. “너는 도망치는 거야.” by 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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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사랑이 뭐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감정이긴 해? 유니콘 같은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안 보여? 나한텐 네가 전부인데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시큰둥한 질문에도 활기찬 답변이 돌아오는 그를 신기해하는 중이었다. 내 앞에는 언제나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굴러다니는데, 그의 앞에는 꽃길만 있었는지. 그에게서 분홍색 단어들이 흘러나와, 빛을 잃은 회색의 나에게 부딪쳤다. -뜨겁게 빨리 달아오른 사랑은 금방 식어 두고 봐. -난 네가 너무 좋아. 난 오래오래 팔팔 끓을 꺼야. 두고 봐. -나를 얼마나 만났다고, 나에 대해 다 알지도 못하면서 전부를 사랑한다는 게 가능해? -사랑은 다 알아야 가능한 게 아니야.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게 됐어.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 금방 지나갈 거야. 두고 봐.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카레 냄비를 꺼내기 가장 적합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냄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어깨와 귀 사이에 있는 휴대전화가 마찰력을 무시한 채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에 힘을 주자 이번엔 손에 들려있던 냄비가 균형을 잃었다. 순식간에 카레가 가득 담긴 냄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뚜껑이 날아간 카레는 자유를 얻어 천장까지 튀어 올랐다. by 이안_이안의 숏텐츠 
3월의 새 학기, 가족들을 보내고 난 뒤 집 안에 남은 아침 햇살이 나를 천천히 깨웠다. 창가에 앉아 집안을 한 번 둘러봤다. 햇살 속에서 어제는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하나둘 떠다녔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싶지만, 눈앞의 작은 먼지들이 나를 먼저 움직이게 했다. '그래, 이 집을 돌보는 사람은 나니까. 집을 정돈하는 일도 나의 하루에 속해 있으니까.' 누군가는 집 안에 있는 이 시간이 여유로워 보인다고 하고 누군가는 부럽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나도 그 말에 기대어 괜히 한 번 웃어봤다. 헤드셋으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쌓인 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면서. 억지로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웃으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집을 돌보는 사람으로 과제 중 하나인 청소를 해결하고 난 후, 책상에 앉아 반짝이는 유리창에 비치는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봤다. 펜을 들고 작은 수첩에 느낌대로 선을 그리고 손이 이끄는 대로 끄적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작은 시간을 조금씩 만들어 보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스케치하고 덧칠하는 그 행동은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by 이지선_햇살 좋은 창가 MORE>>>
by 윤명주_사적인 지각변동 한참 전, <무한도전>의 어떤 특집 편에서 여러 분야의 패널들이 출연해 프로그램이 나아갈 방향 따위를 이야기하던 걸 기억한다. 어차피 예능 프로그램이니 패널들이 했던 발언의 사실 여부나 신빙성을 따지는 건 별로 의미 없겠지만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발언이 하나 있다. 프로그램이 장기화되면서 유재석을 비롯한 출연자들이 분명 힘에 부치는 구성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남성들'이 아니라, 누가 하더라도 어려운 도전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출연자들이 힘든 척을 안 한다는 말이었다. 패널이 그 말을 꺼낸 의도는, 그래서 점점 더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훌쩍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 출연자들 태도가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의 의견이긴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확실히 자기가 처한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힘들 게 뻔한데 힘든 척 하지 않는 모습은, '생긴 게 어떻든 꽤 멋진 일에 속하는 구나' 하는 감각을 얻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면서 우리는 종종 행ㆍ불행에 자신을 대입해보게 된다. 불법촬영물 피해자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 성폭력 생존자들. 전쟁범죄 피해자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을지 생각하며 공감을 느끼고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한다. ‘만사형통’은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듯이, 매사가 지옥 같은 인생 또한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더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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