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이나 걸릴 순 없으니까 _ 영화 <설득>

8년이나 걸릴 순 없으니까  _ 영화 <설득>
이미지 출처: 영화 <설득>(2022) 공식 스틸컷 © Netflix

인생의 갈림길이 많아질수록,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같은 후회가 많아진다. 더군다나 그 선택이 다른 사람의 설득 때문이라면 후회는 원망으로 바뀐다. 나에게는 그것이 제주행이었다.

 

몇 년 전 나는, 쉼 없이 일했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작은 규모의 직장이었기에, 내가 발전하는 만큼 함께 성장하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그게 재밌어서 힘든 줄도 몰랐다. 그렇게 3년을 매진하고, 문득 번아웃이 찾아왔다. 그러자, 내 앞엔 선택지가 놓였다. 서울에서 치열하게 경쟁하여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할 것인가, 비슷한 업무 환경이지만 조금 더 여유로운 제주도로 향할 것인가.

 

나는 제주로 향하기로 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고, 조금은 여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결심을 가족에게 선언하자, 엄마는 말했다.

“너는 도망치는 거야.”

엄마의 말은 크게 울렸다. 엄마는 내가 남들처럼 ‘공무원’이 되거나, 집안의 자랑으로 자란 만큼 더 성장하길 바랐다. 더 안정적인 곳에서 편하게 일하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엄마는 나의 직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딸은 뭐 하냐.”라는 친구의 질문에 엄마는 제대로 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지친 하루를 투정할 때면, 시험을 준비해 보라는 잔소리가 돌아왔다. 엄마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삶을 사는 내가 탐탁지 않던 것이다. 엄마를 더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제주행을 접었다.

 

그 후로 나는 오랫동안 그 결정을 후회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본 영화 한 편이 나를 제대로 마주하게 했다. 동명의 제인 오스틴 소설을 리메이크한 넷플릭스 영화 <설득>이다. 새로운 해석도, 원작의 충실한 재현도 아닌 어중간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 평범함 덕분에 오히려 원작의 핵심이 선명하게 보였다. '설득'이라는 제목의 진짜 의미 말이다.

 

주인공 앤 엘리엇은 해군 중령 프레데릭 웬트워스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혼을 원했지만, 엘리엇 가문은 무려 ‘준남작’의 귀족 가문으로 무명의 젠트리 계급인 웬트워스와는 신분 격차가 컸다. 그는 돈도 명예도 없는, 장래가 불투명한 젊은이였다. 대모 러셀 부인은 앤이 걱정되어 둘의 결혼을 말린다. 어머니처럼 의지하던 러셀 부인의 말에 앤은 설득되어 웬트워스와 헤어진다.

 

앤의 결정은 두 사람의 인생을 갈라 놓았다. 앤은 이후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결혼하지 않은 채로 8년을 보냈다. ‘결혼 적령기’가 지난 그는 마치 사회에서 인정받는 화려한 무대에서 쫓겨난 모습이다. 그 사이 남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나아간 웬트워스는 전쟁에서 풍족한 전리금과 명예를 얻었다. 사랑하는 이조차 자신을 의심할 때, 그는 뚝심 있게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반면 앤은 러셀 부인을 원망할 뿐이었다. 하지만 앤의 결혼을 막은 건, 그의 아버지도 대모 러셀 부인도 아니다. 주변의 말을 빌려 자신을 합리화한 앤 본인이다.

 

멈춰 있던 앤의 시간은 웬트워스와 재회한 후에야 다시 흐른다. 앤은 그를 통해 우유부단함의 결과를 제대로 확인한다. 좌절하고, 실망하고, 부끄러워한다. 이 시간을 모두 거치고 나서 앤은 드디어 스스로 판단한다. 러셀 부인은 웬트워스의 약혼 소식을 알리며 다시 한번 다른 이와의 결혼을 권유한다. 하지만 앤은 이미 판단을 마쳤으므로 설득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웬트워스와 결혼하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앤과 마주하고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내 인생의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엄마를 원망했다. 앤처럼 방에 혼자 있으며 놓쳐버린 기회를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제주행을 막았던 건,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제주도여야만 했던 게 아니다. 진짜 내 인생을 꾸려갈 기회였지만, 자신이 없던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 사이 각자의 세상을 넓힌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홀로 부끄러워했다. 이제 내 신념으로 나아갈 때다. 8년이나 걸릴 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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