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든 있다

어디에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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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 <무한도전>의 어떤 특집 편에서 여러 분야의 패널들이 출연해 프로그램이 나아갈 방향 따위를 이야기하던 걸 기억한다. 어차피 예능 프로그램이니 패널들이 했던 발언의 사실 여부나 신빙성을 따지는 건 별로 의미 없겠지만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발언이 하나 있다. 프로그램이 장기화되면서 유재석을 비롯한 출연자들이 분명 힘에 부치는 구성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남성들'이 아니라, 누가 하더라도 어려운 도전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출연자들이 힘든 척을 안 한다는 말이었다. 패널이 그 말을 꺼낸 의도는, 그래서 점점 더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훌쩍 넘어선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 출연자들 태도가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의 의견이긴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확실히 자기가 처한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힘들 게 뻔한데 힘든 척 하지 않는 모습은, '생긴 게 어떻든 꽤 멋진 일에 속하는 구나' 하는 감각을 얻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면서 우리는 종종 행ㆍ불행에 자신을 대입해보게 된다. 불법촬영물 피해자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 성폭력 생존자들. 전쟁범죄 피해자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을지 생각하며 공감을 느끼고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한다. ‘만사형통’은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듯이, 매사가 지옥 같은 인생 또한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누가 겪더라도 지옥이 따로 없었을 나치 수용소에서의 삶을 통과한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세상 끝 동물원」을 처음 집어 들면서 나는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치 수용소에 있었던 일을 담았다니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지옥 같았을지 예단했고, 그들의 미래가, 앞으로의 그들이 망가지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책을 펼쳤을 때와는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데, 그 당연한 것이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거대담론을 만났을 때 작동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셈이다. 수용자 혹은 피실험자로 몇 년을 수용소에서 사는 동안 지옥만 겪어야 했던 것은 아닐진대. 사람이 있는 곳에는 우정도 있고, 가족애도 있고, 심지어 첫사랑도 있다.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 절망과 고통이 미래나 희망과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주워 올리는 것이 섣부른 행동일 수도 있겠다. 상처나 트라우마는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어떤 때는 견딜만한 것이다가도, 어떤 때는 온 존재를 휩쓸어버리는 거대한 블랙홀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간에 인간은 희망을 말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존재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견고함을 「세상 끝 동물원」을 통해 만났다.

리베카 솔닛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희망은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 미래가 아직 씌어지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희망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고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정보에 근거하여 영리하게 판단하되 늘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러니 희망은 거창한 담론이기 전에 어떤 상황에서도 말할 수 있는, 혹은 말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선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희망’이라는 말이 다가왔을 때, 내게 주어진 상황이나 혹은 불행한 사건ㆍ사고를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런 일들이 애초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면 좋겠지만(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그런가?’ 생각해 보게 된다), 반갑지 않은 일을 맞닥뜨렸을 때 어떤 선택이 ‘나를 쫌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지 힌트를 얻었달까. 멋진 사람으로 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불행을 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할 말이 없지만 인간사에 불행을 피해가는 법 같은 게 존재할리 만무하니 기왕이면 ‘쫌 멋진 사람’으로 사는 쪽을 선택할 것 같다. 그리고 ‘쫌 멋진 사람’이라 함은 나를 강타한 불행이라는 사건 앞에서도 징징대지 않고 받아들임과 동시에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알아간다.

그녀를 용서한다고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을 없애지도 악몽을 잠재우지도 못했다. 새로 시작할 수도 없었다. 티끌만큼도 끝이 아니었다. 나의 용서는 한없는 반복이었고,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실험이, 그들이 부여한 번호가, 그들이 채취한 샘플이 헛된 것임을 증명하며, 한 소녀가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해 그들이 과소평가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나의 용서로, 나를 없애려 한 그들의 실패는 확실해졌다.
p.384. <세상 끝 동물원>, 어피니티 코나

불행을 안겨준 사건은 받아들이더라도 죄를 행한 사람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의 행동과 존재를 분리해 생각하는 건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걸 터득해야 용서가 가능할 것 같다. 용서한다고 끝이 날 고통이라면 억지로라도 하겠건만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기에. 「용서라는 고통」의 작가는 용서를 “내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용서가 가능한 존재, 그런 정도의 열정을 가진 인간 존재는 내게 아직 먼 얘기다.

누군가는 용서를 통해 옆구리의 창을 뽑아낸다지만, 나는 여전히 그 창을 의식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불행은 특별한 재앙이 아니라 삶의 배경일 뿐이라는 것, 그 어두운 배경 위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첫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의 하루가 조금은 버텨낼 법한 일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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