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깨운 시작, 그래도 괜히 웃어본다

햇살이 깨운 시작, 그래도 괜히 웃어본다
ⓒ 2026. 이지선. All rights reserved.

3월의 새 학기, 가족들을 보내고 난 뒤
집 안에 남은 아침 햇살이 나를 천천히 깨웠다.
창가에 앉아 집안을 한 번 둘러봤다.
햇살 속에서 어제는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하나둘 떠다녔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싶지만,
눈앞의 작은 먼지들이 나를 먼저 움직이게 했다.

'그래, 이 집을 돌보는 사람은 나니까.
집을 정돈하는 일도 나의 하루에 속해 있으니까.'

누군가는 집 안에 있는 이 시간이 여유로워 보인다고 하고 누군가는 부럽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나도 그 말에 기대어 괜히 한 번 웃어봤다.
헤드셋으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쌓인 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면서.

억지로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웃으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집을 돌보는 사람으로 과제 중 하나인 청소를 해결하고 난 후,
책상에 앉아 반짝이는 유리창에 비치는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봤다.
펜을 들고 작은 수첩에 느낌대로 선을 그리고 손이 이끄는 대로 끄적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작은 시간을 조금씩 만들어 보는 즐거움이 있으니까.
스케치하고 덧칠하는 그 행동은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꿈꾸던 그곳으로 나를 순간이동 시켜주었다.

작은 행동 하나로 삶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다만 조금 쉽지 않을 뿐이었다.

같은 일상이지만 내 모습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 분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즘은 이런 평범한 날들을 그림으로, 이야기로 조금씩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록된 하루는 언젠가 작은 추억이 될 테니까 라며.
그 흐름 속에서 나는 계속 걸어오고 있었다.


아주 작은 재능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능성을 믿고 다시 한번 몸을 펴 본다.
빛이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걸어간다.
이름 없이 흘러가던 날들을 지나 이제는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아마도 이 시작은 그렇게 조용히 나의 하루 속에서 자라고 있을 것이다.

ⓒ 2026. 이지선. All rights reserved.

이미지 출처 : 그림책<너에게로 가는 길>(2022) ⓒ 2026. 이지선. All rights reserved.

Read more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집에서 삶을 나누는 사람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촌수로 이어진 관계들이 있겠지요. 남편을 기준으로 하면  어머니,아버지, 그 위로 이어지는 할머니까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엄마, 아빠까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져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는 모두 같을까요?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축제가 끝난 뒤

축제가 끝난 뒤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체육대회가 끝난 운동장에는 종이 응원 도구 몇 개가 굴러다닌다. 하루 종일 울리던 음악은 멈췄고, 스피커에서는 잡음만 흐른다. 아이들은 하나둘 교문을 나선다. 반티 위에 겉옷을 걸치고, 친구들과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웃는다. “이 사진은 계속 봐도 웃겨” “내 표정 완전 이상해. 이거 반톡에 올린다.” 오늘은 분명 시끄럽고 즐거운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노트·수첩 : 思痕(사흔)

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