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프스톤 : 발가벗고 산다는 건

그라프스톤 : 발가벗고 산다는 건
ⓒ 2026. Seosai All rights reserve

연필은 모두 옷을 입고 태어난다. 나무라는 옷이다. 

그러나 그라프스톤은 태초의 아담처럼 처음부터 발가벗고 세상에 나왔다.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숨기지 않은 채.

나는 진한 농도의 연필을 좋아한다. 연필이나 샤프심을 살 때 항상 2B를 사곤 했는데 좋아하는 연필가게에서 6B연필을 발견했다. 

여기서 B는 Black. 앞에 붙은 숫자가 클수록 흑색이 짙고 그만큼 무르다.   

이 연필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진가를 미처 몰랐다. 내 눈엔 6B라는 연필이 가진 진한 농도만 들어왔다. 

“비닐을 벗기시면 안 돼요. 전체가 흑연인 연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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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몸체를 살폈다. 검은 연필이 아니라, 몸통 자체가 흑연이다. 

일반 연필은 나무를 깎아내야만 본색을 드러내지만, 그라프스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감출 줄 모르고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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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필은 흑연의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태어났다. 

스케치나 드로잉을 하는 사람을 위한 전문가용 연필이란 말씀. 초기의 연필도 아마 이런 형태였겠지. 그러다 손에 묻고 잘 부서지는 흑연의 불편함을 개선하고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나무라는 갑옷을 두르게 된 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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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굳이 입혔던 옷을 벗겨버린 걸까. 

연필은 원래 나무 안에 흑연이 들어 있는 물건이다. 우리는 평생 그런 모습의 연필만 보며 자랐다. 그래서 나무 없는 연필은 어딘가 미완성처럼 보인다. 마치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낯설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은 이 연필이 아니라 내 고정관념이었다.

글씨를 쓰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흑연이다.

나무는 흑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손에 흑연이 묻지 않게 하고, 쉽게 부러지지 않게 하고, 손에 쥐기 좋게 만드는 친절한 껍질이다.

그런데 까렌다쉬는 그 껍질을 과감히 벗겨버렸다.

'주인공은 흑연이다.'

그 한 문장을 연필로 만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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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연 덩어리다 보니, 몸값은 비싸고, 비싼 만큼 세심히 다뤄야 한다. 

“잘 부러지니까,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조금만 세게 쥐어도 부러질까 조심하게 되고, 연필심에 가깝게 잡으면 손끝이 흑연 가루에 쉽게 더럽혀진다. 강도는 일반 연필보다 훨씬 약하다. 고이고이 모셔두었는데도 허리에 금이 가 버렸다. 몸을 감싼 실오라기 같은 비닐이 없었다면 이미 반토막이 나 버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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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연약함 때문에 이 연필은 더 정직해 보인다.

감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비슷하다.

나무는 흑연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흑연을 감춘다. 

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나무를 두르는 걸까. 

직함과 경력, 나이와 역할을 차곡차곡 두른 채 살아간다. 그것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나무가 된다. 덕분에 쉽게 상처받지 않고, 조금 더 단단한 척 살 수 있다.

직업이라는 나무, 체면이라는 나무, 성공이라는 나무. 

쓰일수록 짧아지고, 닳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연필.

그 모든 것을 벗겨냈을 때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껍질을 모두 벗기고 나면, 내 안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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