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쓰레기의 미학 _ 뜨개 인형

이미지 출처 : Photo by 이표
이미지 출처 : Photo by 이표

뜨개질을 취미라고 말할 수 있을 때쯤, 원칙을 하나 세웠다.

사용(使用)하지 않을 거면 뜨지 않는다.

실질적인 용도가 없으면 뜨지 않겠다는 말이다. 당연한 명제 같은데도 지키기 어렵다. 뜨개 웹사이트는 신상 실과 도안을 수시로 내놓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유행하는 ‘토마토 가방’ 도안으로 나를 안내한다. 하지만 내 옷걸이에는 이미 형형색색의 뜨개 가방이 걸려 있다. 마무리만 하면 가방이나 모자, 파우치가 될 편물들도 수두룩하다. 선물도 한두 번이지, 받는 사람에게 처치 곤란 1순위 선물이 수공예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벽이 무너졌다. 인형을 뜨기로 한 것이다. 인형도 이미 많다. 굳이 뜨개로, 어디에 쓰지도 못할 것을 만들겠다니. 쓰레기 양성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환경 오염도 심각한 마당에 죄책감이 들었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이 일었다.

뜨개는 주기적으로 ‘충동 신(神)이 내리’는 가장 오래된 취미였다. 어릴 땐 대바늘이었고, 지금은 코바늘이라는 것만 다르다. 몇 년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집안에서 즐길 거리로 뜨개질이 급부상했다. 유행이 부추기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바늘보다 코바늘이 나에게 잘 맞기도 했다. 실은 종류별로 넘쳐났다. 그런데도 또 구매하고 싶어졌다. 기존 실은 너무 거칠거나 부드러웠고, 너무 두껍거나 가늘었다. 색은 너무 칙칙했다. 이렇게 실이 많은데도, 도안에 알맞은 건 왜 없을까. 항상 의문이다.

결국 결제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여기저기 방치된 실을 꺼냈다. 분명 인형을 뜰 만한 실이 있을 것이었다. 온갖 꼬투리 실은 타폴린 가방에, 리넨 실 세트는 큰 플라스틱 상자에, 어느 것은 중고 거래로 받아온 상태 그대로 밀봉되어 있었다. 고르고 골라 4호 바늘에 알맞은 실을 찾았다. 인형 피부가 되기에도 색이 괜찮아 보였다. 실 정보가 담긴 띠지는 없었지만, 인형 따위엔 지나치게 고급 실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영원히 가능성으로 남는 게 좋을까. 설사 별 의미는 없어도 당장 쓰이는 게 좋을까. 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실도 효능감을 느끼고 싶을 것이다.

즐겨찾기 해둔 설명 영상을 틀었다. 배경음으로 깔아둘 콘텐츠도 필요했다. 주로 귀로 들어야 할 테니 이미 한번 본 것이거나, 평소 화면을 제대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피했던 공포 영화를 틀어놓았다. 한국 콘텐츠여야 하는 건 필수였다. 기법을 완벽하게 익힌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지만, 나는 여전히 한 번씩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일시정지 버튼을 수시로 눌렀다.

일부러 인형 솜도 사지 않았다. 예전에 ‘당근’으로 왕창 사둔 뽀글실을 쓰기로 했다. 판매자는 옷을 뜨는 비싼 실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몇 번이나 엉키고 망쳐서 포기했던 실이었다. 복슬복슬하여 솜을 대신하기 좋았다.

이미지 출처 : Photo by 이표
이미지 출처 : Photo by 이표

이번에도 실수했다. 두 단을 빼고 뜬 것이다. 사실 두 단 차이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망쳤다. 나는 실을 지나치게 당겨서 뜨는 ‘쫀손’인데, 쫀손이 인형을 뜨면 몸이 돌아간다. 인형 왼쪽 다리가 살짝 안으로 말렸다. 몸통은 정면인데, 얼굴은 살짝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 틀어진 몸과 전부 똑같았다.

이런 불량품은 ‘푸르시오’행이었다. 하지만 놔두기로 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실로 완성한 잔뜩 틀어진 인형. 제법 웃겼다. 두 번째 인형은 거의 완벽했다. 도안대로 떴고, 손에 힘도 풀어 통통한 모양새를 살렸다. 이번엔 눈이 이상했다. 실의 두께가 중간에 변했는지, 한쪽 눈은 도통 실이 얹어지지 않고 게슴츠레했다. 옷도 입혀 보았다. 잘 뜬 것 같은데, 첫째한테는 너무 크고 둘째한테는 너무 짧았다.

엉망진창으로 뜬 두 인형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계속 보다 보니 귀엽고 예쁘다. 사랑스럽다. 나만 알아채는 흠, 나만의 우스꽝스러움. 무용(無用)과 예쁜 쓰레기는 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최소한의 쓰임을 위해 열쇠고리를 달아줄까. 음. 그러지 않으련다.

 

Read more

ⓒpixabay

11. 탈주 스캔들 (11) - 어지간하면 딴 데 힘 안 쓰려 했는데

흔하고 익숙한 복도식 아파트. 복도 끝에서 세 번째 집으로 들어가면 ‘삼촌’과 둘이 살았던 집이 나온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부모님을 대신해 자주 돌봐주셨던 분. 눈앞에 선명하게 시큰대는 한 사람을 떠올리던 인하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 형사 일을 하겠다고? - 네, 이미 발령났어요. - 뭐라고?   진로를 결정한 뒤 말을 전하자 혀를 내두르는

By 가넷베리Garnetberry - 가넷베리의 숏텐츠
타인의 상처를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타인의 상처를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인터뷰이가 고통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스물다섯 살 난 아들을 의료사고로 잃은 어머니가 아들의 사고 현장이 담긴 CCTV 영상을 한 프레임씩 돌려 보면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뻔한 문장을 기사에 담기 위해서 나는 기어이 그 질문을 뱉었다. 예상했던 답변이 한숨을 통과해 나오자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자괴감을 느꼈다.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잠시 내려놓고 떠나자

잠시 내려놓고 떠나자

울음을 삼킨 채 떨리는 입술을 깨문다. 소리치고 싶지만, 입안을 맴도는 말을 삼킨다. 몇 번이고 꺼냈던 말은 끝내 닿지 못하고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온다. 그럴 땐 마음을 잠시 쉬게 할 나만의 피서지를 떠올린다. 따스한 햇볕 아래 눈을 감고 시원한 물결 속으로 발끝을 내밀어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 발가락 사이를 살랑대는 물살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전설의 시 창고-시 못쓰는 밤

전설의 시 창고-시 못쓰는 밤

예쁜 유리잔 속에 잘 영근 달 하나 담가 컴퓨터 앞에 놓아두고 . . . 아무 말도 고이지 않은 맑은 수면 . . . 키보드 위에 가지런히 모아놓은 손가락들 꼼지락꼼지락 눈치만 보다 슬그머니 거리를 넓힌 검지 끝에 시작되는 세상 구경 부업삼아 회사 차려 폐업까지 시켜보고 갈 길 잃은 내 마음 심리 파악 완료 주인 찾은 강아지 소식에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