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상처를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인터뷰이가 고통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스물다섯 살 난 아들을 의료사고로 잃은 어머니가 아들의 사고 현장이 담긴 CCTV 영상을 한 프레임씩 돌려 보면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뻔한 문장을 기사에 담기 위해서 나는 기어이 그 질문을 뱉었다. 예상했던 답변이 한숨을 통과해 나오자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자괴감을 느꼈다. 내가 쓰려는 것이 소설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극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럼으로 불합리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내 밥벌이보다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라 자위했다. 그렇게 밀려오는 죄책감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덮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보편의 반응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자식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는 게 두려워 사정상 봐야 하지만, 끝까지 못 보는 부모도 있고, 프레임을 돌려 가며 기록을 남기는 부모도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누군가는 독하다, 대단하다 평했다 한다. 나중에 깨닫게 되었지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은 다양하고, 그걸 표출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독기를 품어야만 가능한 일도 아니고, 한편으로 대단하다 칭송 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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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의료사고 피해자나 유가족들에게서 ‘피해자성’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사람의 고통이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님에도 어떤 정형화된 아픔이나 고통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인류 보편적인 감정이나 원형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가장 중요한 본질이 훼손된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성폭력 생존자가 보여주는 밝은 에너지는 그가 겪은 일의 원인이었다가 때로는 그 결과가 되는 걸 보기도 했다. 학교폭력 피해를 당했던 이에게 “그렇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냐”고 묻기도 했다. 2차 가해이자 또 다른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세상의 틀을 벗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상한 것이 되는 마법.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긍정하듯 말하는 사람을 보며 ‘분명히 이면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 믿는 것 또한 그렇다.
"(성소수자라도) 좀 당당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뭔가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특별하게 태어난 거니까. 시대, 시절에 연연하지 말고 당당했으면. 그리고 일대일로 설득해라. 부모가 인정 안 하면 끝까지 부모하고 싸워라. 그래야만 이길 수 있는 거죠. 난 그냥 우리도 일반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게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남이 싫어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우리의 노래가』, 137쪽
얼마 전 『우리의 노래가』 북토크에서 만난 박인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한 사람이었다. 여성 지인들이 그를 '언니'라 부른다.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을 여자라고 여기는, 하지만 트랜스젠더라 하지 않고 게이라 칭하는, 내가 알고 있던 상식에 맞지 않는 사람.
“우리가 왜 소수자예요?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사세요.”
모든 맥락을 제거하고 그것만이 정답이라 믿는 것도 경계할 일이지만, 일차원적인 느낌처럼 저렇게 말하게 된 데는 자기 긍정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는 나름의 진단은 온당한가.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고통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