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 : 볼펜은 늙지 않는다
몇 주전 오래된 친구의 안부를 듣고 놀랐다. 그 친구의 이름은 모나미. 연이은 실적 부진으로 상장 폐지 위기에 몰렸다는 사실이 갑작스러웠다. 60년간 무려 40억 자루가 팔렸다는 국민 볼펜의 주역. 모나미의 위기에 “국민 볼펜은 국민이 지킨다”라는 응원이 이어지며 위기를 넘기는 듯했지만, 다시 큰 폭으로 하락하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문득 펜꽂이로 손을 뻗었다.
수십 자루의 펜 속에 모나미가 없다. 있다면, 최근에 산 모나미 네오 만년필 한 자루. 돌이켜보니 내가 즐겨 쓰는 펜 목록에도, 문구점에 갈 때 꼭 둘러보는 브랜드에도, 모나미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모나미를 찾지 않게 되었다. 그 사실이 모나미의 위기 뉴스보다 더 마음에 걸렸다.
백화점 문구 코너에 가보니, 매장 중앙, 필기구 진열대의 가장 좋은 자리는 스테들러, 파버카스텔, 지브라, 유니 같은 외국 브랜드 차지. 모나미는 진열대 측면에 외톨박이처럼 밀려나 있다. 모나미의 상징인 153 볼펜의 최신버전부터 샤프와 형광펜까지 진열돼 있었지만, 왠지 눈길을 붙잡는 펜은 없었다.
가격은 놀랄 만큼 착했다. 몇만 원대 고가의 제품들 속에서 모나미 153 그리퍼는 고작 6백 원. 다른 펜도 기껏해야 천 원대, 비싸도 5천 원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153 그리퍼’와 ‘153 스틱’, 두 자루를 집었다. 계산된 금액은 1,400원. 타사의 펜 한자루를 사기에도 모자란 금액이다.
모나미 153그리퍼는 153 시리즈에 고무그립이 추가된 제품.
착 감기는 그립감도 좋았고 부드럽고 균일하게 잘 써진다.
여전히 좋은 필기구인데다 저렴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설렘.
한 자루를 더 갖고 싶다는 설렘이 부족하다.
하긴, 모나미153은 감성으로 쓰는 필기구가 아니었다.
저렴하고 잘 써지는, 잃어버려도 크게 부담없어서 공공장소라면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었던 그런 볼펜. 깜지를 써도 아깝지 않았던 볼펜. 끼워주는 판촉상품으로 돌리기에 딱 좋은 볼펜.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꼭 한번은 손에 쥐어봤을, 진짜 국민 볼펜이었다.
그런 모나미의 위기를 보면서 나는 할아버지의 우산공장을 떠올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작고하셨지만, 아빠는 종종 자랑스럽게 할아버지가 운영하셨던 우산공장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1960년대만 해도 대나무로 만든 살대에 기름 먹인 한지를 발라 만든 지우산이 대중적이던 시대였다. 대한민국에 유통됐던 지우산 중 상당수가 전라도 완주에서 생산됐다. 할아버지의 공장은 직공 숙소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있었지만 시대의 파고를 만나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고 했다. 싸고 비에 강한 비닐과 천우산의 등장으로 할아버지의 종이 우산은 시대를 건너지 못했다.
기록의 디지털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나미는 어떤 기록 도구를 만드는 회사인가.’

1963년 모나미 153 볼펜의 첫출시 당시 가격은 한 자루에 15원.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5원 , 신문 한부가 15원이었다고 한다. 모나미는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볼펜을 만들겠다는 철학을 153이라는 숫자에 담았다는 설이 있다. 40여 년간 우리나라에서 한 세 대 이상 하나의 볼펜으로 기억되는 브랜드가 모나미 말고 또 있을까. 모나미 153볼펜은 수많은 사람들의 첫 글씨와 첫 시험, 첫 사인을 함께한 기록의 이름이다. 한국인의 기록문화를 60년간 만들어온 회사란 이야기다. 모나미는 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되풀이하면서도, 다음 세대에 들려줄 이야기를 아직 찾지 못한 듯 하다.
볼펜은 늙지 않는다.
늙는 건 손에 쥔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택받을 이유를 잃어버린 브랜드다.
이번엔 국민의 응원이 있었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 한국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문구브랜드가 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내 아버지가 내 이름을 처음 쓰게 해준 그 볼펜이 다음 세대에게도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10년, 20년 후에도 책상 위라면 어디에서든 모나미 한 자루쯤 꽂혀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