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룡
며칠 전 통장에 찍힌 월급 액수를 보고 계산기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빠졌습니다. 어딘가 헛헛하다 싶더니 역시였습니다. 지난달 명세서와 한참을 눈싸움 하며 따져본 끝에 마침내 덜미를 잡았습니다. 주휴수당 항목이 문제였습니다. 치킨 몇마리 값이 사라질 위기입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 일단 근로기준법 조항을 검색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권리의 출발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머릿속 노동운동의 첫 장면은 늘 1970년 청계천의 전태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무려 40년 앞선 1931년,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한국인에 의한 노동운동이 있었습니다. 여공 강주룡의 이야기입니다.
평양의 고무공장. 기계 냄새와 고무 타는 냄새가 뒤섞인 작업장에 임금 삭감 공고가 붙었습니다. 이미 빠듯한 봉투에서 또 돈을 덜어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밥을 끊고 공장 마당에 모여 앉았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일본 경찰을 등에 업고 노동자 전원 해고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날 밤 강주룡은 밧줄 하나를 품에 안고 밤나무골 을밀대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래로는 군중과 일본 경찰들이 섞여있었습니다. 그사이로 일제 식민 자본의 횡포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체공 투쟁', 즉 고공 농성이 벌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강주룡의 1931년 을밀대 농성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기록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 노동 운동사에서 최초의 고공 농성으로 널리 평가되는 사건입니다. 당시 동아일보·조선일보·매일신보 등 언론은 이례적인 투쟁 방식을 보도했으며, 『동광』은 강주룡을 ‘을밀대 체공녀’로 소개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체공’이라는 표현과 고공 농성의 투쟁 방식이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경찰에 강제로 끌려 내려와 유치장에 갇힌 뒤에도 그는 풀려날 때까지 단식을 이어갔습니다. 며칠 뒤에는 '적색 노조 연루'라는 사상범이라는 혐의까지 겹쳐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창살 안에서도 그의 투쟁은 계속되었습니다. 1년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그는 걸음조차 걸을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두 달 후, 제대로 된 약 한번 써보지 못한 채, 그렇게 그는 평양 서성리의 한 빈민굴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이틀 뒤인 8월 15일, 그 빈민굴 앞마당으로 백여 명의 노동자 동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화려한 상여 대신 손을 맞잡고 묘지까지 걸으며 강주룡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우리는 49명 파업단의 임금삭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지역 2,300명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원인이 될 것이므로 죽기로써 반대하는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인, 노동자, 그리고 여성.
타인이 떨어지지 않을 담장을 쌓아 올리기 위해 스스로 벼랑으로 걸어들어갔던, 31살 강주룡이었습니다.
모니터 화면 속 급여 명세서로 눈을 돌립니다.
치킨 몇 마리 값이라며 '그냥 넘어가 버릴까' 망설이던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닫으려던 계산기 자판을 두드리며 권리의 값을 끝까지 셈해보기로 했습니다.

"유치장에 갇힌 강주룡, 74시간째 단식 투쟁"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갔던 여성 근로자, '임금 인하를 취소해야 밥을 먹겠다'

인물정보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9723
강주룡 선생 핵심 연대기 (1901~1932)
- 1901년: 평북 강계 출생.
- 1914년 (14세): 서간도로 이주.
- 1920년 (20세): 최전빈과 결혼 (남편은 독립군 활동 중 병사).
- 1926년경: 평양 정착 후 평원고무공장 입사.
- 1931년 5월: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파업 및 단식투쟁.
- 1931년 5월 29일: 을밀대 지붕 위 고공농성 및 대중 연설.
- 1931년 6월: '평양 적색노조 사건'으로 재체포 및 투옥.
- 1932년 6월: 옥중 병세 악화로 병보석 석방.
- 1932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향년 31세로 순국.
-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