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지워진 세계, 당신의 일상에 연대를

내일이 지워진 세계, 당신의 일상에 연대를
© 2026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 <정거장>

2026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영화 <정거장>

 고백하자면 나는 예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고작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난민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얄팍한 이미지뿐.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영화 <정거장>을 보겠다고 자리에 앉았을 때는 물론이고, 영화 속에서 파란 깃발과 주황 깃발로 대표되는 두 세력이 이란 같은 나라의 수니파와 시아파를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라고 혼자 멋대로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나는 예멘에 대해서도, 당장 내가 볼 영화에 대해서도, 그게 뭐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주인공 라얄이 남동생 라이스를 전쟁터로 내보내야 하는 위기의 순간에 ‘대체 왜 당장 저 지옥 같은 곳을 떠나지 않는 거지?’라는 순진한 질문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순진했을 뿐만 아니라 오만에 가까운 무지임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하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 내전 중인 나라에 ‘안전한 외부’가 어디 있겠나. 뉴스에서나 가끔 접하던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상처는 생각했던 것보다 일상에 더 크게 작동하는 것임을 나는 자각했어야 했다.

그 세계는, 아무리 어린 남동생이라도 여성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곳이다. 영화에서도 지적하듯 ‘마흐람(Mahram)’ 제도(남성 후견인 제도)는 여성에게 이중의 굴레로 작동해 길을 나서는 순간 동생은 소년병으로 징집되고 자신은 사냥감이 될 수 있었다. 어딜 가든, 소속이 다른 검문소가 즐비한 상황이니 차라리 ‘아는 지옥’이 나은 현실. 돈보다 귀하다는 기름을 갖다 바치는 무한 루프에 빠지더라도 익숙한 곳을 선택하는 건 합리적인 것이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억지 기부가 한 번으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곳은 말 그대로 무법 천지의 세상, 부패가 만연한 곳이다. 그럼에도 라얄이 동생의 징집을 막기 위해 손님들에게 내주어야 할 기름을 내놓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할까.
전쟁터에는 미래가 없다. 검문소를 통과하기 전에 죽고 말 것이라는 서늘한 통찰은 근본적 해결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을 담고 있었다. 라얄이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얻게 된 것은 고작 하루치의 일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걸 어리석다 말할 수 있을까. 아랍권의 여성들이 피임약을 밀거래하고 남편 몰래 피임약을 먹는 것이 수동적인 행동이라고 지적할 수 있겠나. 자식을 지키기 위해 남자아이를 여장하게 만든 엄마의 선택은? 이것이 체제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반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역사는 총을 든 자들의 이름과 새로 그어진 국경선을 기록할 뿐, 그 이면의 삶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만다. 내가 구술생애나 미시사 기록에 관심이 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나는 예멘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만큼이나 그 나라 여성들의 일상에 대해 무지하지만 내 관심은 그들을 향해 있다. 거창한 사명감이나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같은 여성이기에, 나아가 인간이기에 공감하는 것이고, 당연하게도 그 정동은 전쟁터에도 존재한다.

그들이 겪는 비극은 내가 미처 감당 못 할 스펙터클을 안고 있지만 돌아가는 일상은 내게도 익숙하다. 굉음을 내는 폭격기가 머리 위로 지나가도 웃고 떠들며 노래를 부르고, 기진맥진한 자매에게 밥을 내어주는 지독히 평범하고 끈질긴 일상의 편린.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그깟 일상이 무슨 의미냐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 속에서도 기어이 한 사람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내는 건, 무용해 보이는 하루치의 조각들이라면? 어쩐지 거기에 희망을 걸고 싶어진다.

 

Read more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꿈이 있습니까?" 소셜 미디어 릴스를 넘기다 길 가는 이들에게 불쑥 꿈을 묻는 인플루언서의 영상을 보았다. 어느 정도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꿈이라면 흔쾌히 들어주며 얼마 후 훈훈하게 콘텐츠를 마무리한다. 문득 길을 걷다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며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먹고사는 일에 치여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우드 와이드 웹

우드 와이드 웹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숲속의 나무들은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뿌리, 각자의 줄기, 각자의 잎. 서로 닿지 않은 채 홀로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땅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다. 1997년 네이처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시마드 삼림생태학 교수의 연구 내용에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중력을 잃은 언어 (7) - 하나

중력을 잃은 언어 (7) - 하나

미나의 개인 인큐베이터 안으로 두드리는 진동음이 빠른 박자를 만들었다. 새벽에 겨우 잠든 미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어 빛을 받아들였다. 타미가 헤매는 미나를 억지로 부축하여 일으켰다.  - 아직 수면 시간인데 미안해요. 그런데 급해서요. - 아, 괜찮아요. 무슨일인데요? - 조이가 없어졌어요.  미나는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확 들어왔다. 정신없이 밀실로 달려갔다. 조이를

By 이안 -이 안의 숏텐츠
흔적. 남겨야 하는, 지워야 하는

흔적. 남겨야 하는, 지워야 하는

창가에 앉아 밝게 빛나는 종이를 바라본다. 짧게 이어가는 손길로 조심스레 스케치한다. 그려진 선을 따라 춤추듯 여러 빛깔로 덧칠한다. 마음이 머문 그림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나만의 개성이 새겨진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둔다. 눈을 돌려 햇빛이 깃든 거실 한가운데를 바라본다. 보이지 않던 발자국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탁자에 마시고 올려 둔 유리잔에 입술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