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출처-www.vivianmaier.com/ 비비안마이어 공식 사이트 비비안 마이어 자화상.

"꿈이 있습니까?"

소셜 미디어 릴스를 넘기다 길 가는 이들에게 불쑥 꿈을 묻는 인플루언서의 영상을 보았다. 어느 정도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꿈이라면 흔쾌히 들어주며 얼마 후 훈훈하게 콘텐츠를 마무리한다. 문득 길을 걷다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며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먹고사는 일에 치여 '꿈'이란 단어를 밤에 잠잘 때나 꾸는 것으로 밀어둔 지금,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꿈이란 그 인플루언서 처럼 즉석에서 사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꿈은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길어 올려지기도 한다.

2007년 시카고의 한 허름한 경매장, 동네 역사책에 실을 1960년대 옛 거리 사진을 찾던 스물여섯 청년 존 말루프는 잡동사니 상자 하나를 380달러에 낙찰받았다. 상자 뚜껑을 열자 헌 옷가지와 낡은 영수증, 그리고 수만 롤의 미현상 흑백 필름이 쏟아져 나왔다. 암실에서 첫 번째 필름을 인화기에 올린 순간, 20세기 뉴욕과 시카고 뒷골목의 생생한 얼굴들을 마주했다. 프레임의 완벽한 구도, 찰나를 낚아채는 타이밍, 빛을 다루는 감각은 당대 최고의 거장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로버트 프랭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말루프는 상자 밑바닥에 적힌 사진가의 이름을 검색창에 쳐 넣었다.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

그러나 인터넷 어디에도 그 이름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루프가 그의 실체에 가닿은 것은 2년 뒤, 거짓말처럼 발견한 짧은 신문 부고 기사였다. 필름을 한 롤씩 스캔하고 경매로 흩어진 비비안의 상자들을 추적하던 끝에 마주한 소식이었다. ‘프랑스 출신으로 시카고에서 수많은 이들의 제2의 어머니였던 비비안 마이어, 며칠 전 평화롭게 눈을 감다.’ 비비안의 존재를 세상이 막 알아차린 순간, 정작 그는 83세의 나이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비비안의 생애는 어떠했을까. 오스트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의 불화로 일찍이 결손을 겪고 프랑스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비비안. 프랑스어와 영어가 섞인 독특한 억양,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경계에 머물렀던 유년의 결핍은 그를 평생 ‘이방인의 시선’을 지닌 관찰자로 만들었다. 미국에 정착해 직물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잇던 고단한 나날 속에서, 카메라는 과연 그의 꿈이었을까 숨이었을까.

시카고에서 입주 보모 일자리를 구한 뒤 그는 고용주들에게 늘 '내 방에 자물쇠를 채우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방은 아마도 비밀 암실이자 거대한 아카이브였을것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설 때면 비비안은 늘 목에 중형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걸었다. 허리 높이에서 뷰파인더를 내려다보며 찍는 이 카메라는 피사체와 직접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기에, 대도시의 가장 날것 같은 표정을 있는 그대로 낚아챌 수 있었다.

노년에 접어들어 일자리를 잃고 가난에 쫓기면서도 셔터를 멈추지 않았지만, 인화할 돈이 없어 수만 개의 필름은 봉인된 채 상자 속에 쌓여만 갔다. 이때 노숙 직전까지 내몰렸던 그를 구한 것은 과거 그가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던 삼 형제였다. 성인이 된 그들이 비비안을 찾아내 월세와 병원비를 대주며 마지막 길을 지켰다. 그리고 그가 목숨처럼 지키던 필름 상자들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밀린 보관료 때문에 경매로 넘어가며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평생 15만 장이 넘는 걸작을 품고도 단 한 번의 전시회조차 열지 못한 채 신발 상자에 묻어두었던 여인. 아이러니하게도 남겨진 빚 때문에 처분된 상자로 20세기 사진사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 쓰였다.
사후에야 터져 나온 찬사가 정작 그의 고단했던 생전에는 빵 한 조각 보태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언뜻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혹시 이런 생각이야말로 세상의 잣대로 재단한 편협한 연민은 아닐까. 인정과 명성을 바란 적이 애초에 없었다면,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조차 그에겐 낯선것이지 싶다. 롤라이플렉스를 가슴에 얹고 거리의 찰나를 응시하던 매일매일의 순간 자체가 아마 그에게는 이미 온전한 꿈의 실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그를 기꺼이 부양했던 아이들의 기억처럼, 비비안은 보모라는 일상 속에서도 매 순간 자신의 시선과 삶에 성실했으니 말이다.

꿈이 이루어지는가 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과일까 태도일까. 밤마다 꾸는 꿈처럼, 꿈이란 어쩌면 어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매일의 숨 속에서 담담하게 살아내는 '오늘의 시선'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볼 수 있는 공식 사이트 https://www.vivianmai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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