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

유난
© 2026. 이안. All rights reserved.

문을 천천히 열고 입구에 섰다. 최대한 길게 손을 뻗어 불을 켜고 움직임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움직임도 들리지 않음을 확인한 후, 내가 가야 할 동선에 모든 물건을 장우산으로 넘어트렸다. 물건 뒤에 혹은 아래에 숨어 있을 그것들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하나가 없어진다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들의 출입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은 버린 지 오래였다. 언제나 누군가는 공생 상태로 함께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저 내 눈에만 띄지 않기를. 도망갈 시간을 주었음에도 공생의 규칙을 어긴 자들에게 자비는 없을 테니. 가장 구석에 사각지대를 향해 가지런히 높여있던 실내화를 던졌다. 마지막으로 장우산으로 천장과 벽을 한 차례씩 두드렸다. 이걸로 나의 존재는 충분히 알렸다.

-왜 안 들어가고 있어?
-침입자가 있을 수도 있어. 기다려야 해.
-뭐래.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들어와. 우리 집에 그런 거 없어.

나는 스치고 거침없이 들어가는 지은을 넋 놓고 쳐다봤다. 완전히 혼자 있음을 확신하는 저 말투. 낯설다. 어떻게 이런 세상에 저런 안정감을 가질 수 있지? 두드리지도 살피지도 않고 소파에 몸을 던지는 저 과감함은 어디서 오는 거지? 지은이는 진짜 자기 혼자만의 집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넌 이 집에 너 혼자 있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그걸 왜 의심해?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항상 대비해야지. 침입자는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올지 몰라.

저 표정은 ‘저거 또 시작이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질문을 멈출 수 없다. 저 아이의 행동과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불안하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관계의 틈을 좁히기 위해 나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그 상태에 도달했는지. 하지만 기다려도 답이 없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자, 답을 찾는 중일 것이다. 소파의 모서리 틈을 경계하며 천천히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커피랑 캐모마일 있어. 뭐 마실래?
-오후 1시가 넘었으니, 내 선택지는 캐모마일밖에 없어.

커피포트에 수돗물을 받으며 질문하는 지은이를 빤히 바라봤다. 내 동공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물론 계산 된 행동은 아니었다.

-아, 왜! 모?
-수돗물에 어떤 성분이 녹아들어 우리에게 올지 알고 수돗물을 먹어?
-끓이잖아. 끓이면 괜찮아.
-너희 아파트 물탱크에 뭐가 살면 어떻게? 그런 상상 안 해봤어?
-너의 세상은 그렇구나. 나의 세상은 비교적 안전했어. 괜찮아. 지금까지 먹었는데 안 죽었어. 그럼 된 거 아냐?

미량의 물질은 바로 죽지 않고 몸에 쌓인다는 말을 삼켰다. 지은이가 커피포트 버튼을 누르고 적당한 머그잔을 찾고 있는데, 난 머그잔들이 놓인 곳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컵들이 다 땅을 향해 뒤집혀 있었다. 입이 닿아야 하는 그 면들이 모두 다 무엇이 돌아다닐지 혹은 돌아다녔을지 모를 바닥과 맞닿아 있었다. 머그컵을 타고 그것들이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자리가 보이는 듯했다.

-잠깐, 미안한데 나 컵 한 번만 씻어도 될까?
-얼마든지.

거의 포기에 가까운 양팔의 제스처와 함께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지은을 향해 나는 약간 허리를 굽힌 자세로 몸을 흔들어 고마움을 표현했다.

-혹시 고무장갑은?
-우리 집엔 그런 거 안 키워.
-그럼 나 못 씻는데. 미안.

물러서는 내 자리에 파고드는 지은이는 맨손으로 주방세제의 거품을 머그잔에 바르고 있었다. 주방세제의 거품만큼 내 피부가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젖지도 않은 손을 매만지며 가방에 핸드크림을 찾아 뒤적거렸다.

-참, 인생 피곤하게 살아.
-그렇지. 모든 감각이 그렇게 태어나서 나도 유감이야.

귀찮다는 듯한 표정에서 아주 약간 동정의 눈빛을 비친 지은이가 캐모마일 티백을 뜨거운 물 속에 넣었다. 티백의 미세 플라스틱이 머그컵 안에 캐모마일보다 많은 영역을 차지 하며 퍼져나갔다. 모든 얼굴의 근육을 이용하여 무표정을 노력했다. 색만 잃은 얼굴로 머그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어때? 유기농 캐모마일이라고 해서 사봤는데.

입에 머금은 한 모금의 미세플라스틱을 삼켰다.

-응, 좋네.

Read more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집에서 삶을 나누는 사람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촌수로 이어진 관계들이 있겠지요. 남편을 기준으로 하면  어머니,아버지, 그 위로 이어지는 할머니까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엄마, 아빠까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져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는 모두 같을까요?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축제가 끝난 뒤

축제가 끝난 뒤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체육대회가 끝난 운동장에는 종이 응원 도구 몇 개가 굴러다닌다. 하루 종일 울리던 음악은 멈췄고, 스피커에서는 잡음만 흐른다. 아이들은 하나둘 교문을 나선다. 반티 위에 겉옷을 걸치고, 친구들과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웃는다. “이 사진은 계속 봐도 웃겨” “내 표정 완전 이상해. 이거 반톡에 올린다.” 오늘은 분명 시끄럽고 즐거운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노트·수첩 : 思痕(사흔)

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