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예의
Photo by Lorenzo Spoleti / Unsplash

“나 하나 꽃 피어,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나 하나 물들어,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말하지 말아라. 내가 꽃 피고 너도 꽃 피면 온 세상 꽃밭 되는 것 아니겠느냐.”
누가 봐도 노래의 클라이막스, 어떤 마디보다 힘을 주고 정성을 쏟아야 하는 지점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워야 하는 성악의 세계는 내게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맛을 선사한다. 배에 아무리 힘을 줘도 하찮아지는 나의 폐활량은 마디를 채 마무리하지 못한다. 꽃이 피기도 전에 스러지고 마는 역설의 구간. 어떤 노래보다 아름다워야 할 노래가 처참한 난도질을 당하는 것만 같아 부를 때마다 내상을 입는다.

민중가수 최도은은 내게 성악과 민중가요에 대해 이야기 하던 자리에서 “성악은 목소리를 예쁘게 꾸며서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진정성은 다른 차원의 얘기겠지만 아름답지 못하면 적어도 가곡을 부르는 의미가 없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 당장 호흡곤란에 죽을 것 같아도 티 내지 않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이 세계의 진리다.
아마추어가 서더라도 무대는 무대. 가장 아름답게 정제된 목소리로, 시로 지어진 아름다운 가사를 전달하는 것이 가곡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강습을 받으며 배웠다. 이는 겉치레나 가식과 다르다. 겉치레라면 나의 알량한 에고를 부풀리기 위한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가곡에서의 꾸며낸 최선은 다듬어지지 않은 내 본성이 타인을 찌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깎아내는 고통스러운 노동에 가깝다. 무대에 선 자가 꼭 프로가 아니더라도 그런 태도는 에티켓이라 칭해야 마땅하다.

작가가 초고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초고는 대개 쓰레기다. 머릿속에서 뽑혀 나온,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배설해 놓은 단어의 배열에 불과하다. 그런 걸 독자가 읽는다고 생각하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뭔지 당장 알게 된다.
주어와 술어를 맞추고 단어를 고르는 것은 마치 성악 발성 연습을 할 때 연구개를 들고 횡경막을 조절해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음표에 맞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세상에 던지고 죽어야 할 정제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수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쳐 독자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생각해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러니 이건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 사람을 위해 가져야 할 성숙하고 고통스러운 예의랄까.

악보에 적힌 바로 그 소리를 내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뿜어져 나왔는지, 그래서 정확한 음과 아름다운 시구가 듣는 이의 마음에 가닿아 공명을 일으키고 마는 지가 이 훈련의 핵심이다. 그걸 알면서 산 채로 닭 삶아지는 소리를 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예의라고 했지, 이 과정이 쉽다고는 안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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