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적 사고 vs 정민적 사고
유행이 한참 지났겠지만 원영적 사고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얼마 전까지 사람들은 대개 원영적 사고의 바탕이 삶을 대하는 좋은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장원영이라는 아이돌 가수를 칭송하는 얘기도 들렸다. 장원영에 대한 개인적 심상은 제쳐두고 만사에 긍정 회로를 돌리는 게 한국인들에게 유독 필요한 방식이라는 점은 나로서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온 우주가 나의 행복을 위해 돌아간다는 믿음은 또 얼마나 단편적인 것인지. 내가 걸리는 지점은 그 부분이었다. 왜 꼭 운이 좋은 일상을 바라고, 어째서 모든 것이 행복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건지. 날 때부터 먹구름을 탑재한 채 살아온 나 같은 인생은 다음 생이나 기대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나 같은 인생도 ‘럭키’를 외치며 불운일망정 흐린 눈을 하고 긍정해야 하는 건지. 심사가 뒤틀릴 따름이었다.
얼마 전, 자립 준비 청년의 사례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시설에서 퇴소한 후 대학에 들어가 아르바이트에, 학교 내 자잘한 일까지 해가면서 갓생을 살던 청년에게 어느 날 번아웃이 왔다. 여러 기관에서 준비한 마음 치유 프로그램 같은 것들에 참여하면서 자기를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일 감사 일기를 쓰거나 하루 중 행복했던 순간을 사진이나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그렇게 방구석과 배달의민족 앱에서 벗어났다고 청년은 말했다. 그 청년의 말에 대견해하는 좌중의 분위기에, 까닭 모를 저항감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을 접했을 때처럼,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 청년이 대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청년의 일상이 과거보다 평안하기를 마음을 다해 기원한다. 감사 일기를 쓰는 행위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늘의 변화라든가 그런 소소한 것들에 감탄하는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애초에 사람을 그렇게 몰고 간 사회가, 어른들이 못마땅했다.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졌냐고. 감히 그 질문을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 초를 치는 것 같아 묻지 못했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그 똘망똘망한 청년의 앞날이 내 예상과 달리 진행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애초에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집어넣어 놓고 ‘감사할 줄 모르는 너의 태도 때문에 불행한 거야’라고 나를 비롯해, 온 사회가 부추기는 것 같아서 몹시 마음이 쓰렸다.
그러면 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사는 건 고통이고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몰라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해답을 찾는 건 본인의 몫이지만, 한편으로 나는 왜 인생이 꼭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었다. 그 답은 일찍이 에바 일루즈가 정리해 주었다. 이른바 ‘해피 크라시’는 행복 강박을 뜻하는 단어로 일루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 압박의 또 다른 형태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행복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압박. 그러니 나처럼 운도 별로 없는데, 성질머리까지 나쁜 사람은 저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 아니겠나. 덕분에 감사 일기를 쓰는 행위, 소소한 순간으로 불운을 애써 포장하는 일을 작위적으로 느끼는 나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원영적 사고의 안티테제인 ‘정민적 사고’를 온몸으로 재현하며 사는 게 마땅할 것 같다. ‘별것 없는 인생이지만 그럭저럭 버티며 산다’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서. 우주의 기운이 나같이 하찮은 인간에게 나눠줄 관심이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비가 오면 우산 쓰면 되고 폭풍우에 우산이 뒤집어 지면 비 좀 맞으면 된다. 그러니 내게 원영적 사고는 강요 마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