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시 창고-시 못쓰는 밤

전설의 시 창고-시 못쓰는 밤
글쓴이의 컴퓨터에서 캡쳐

예쁜 유리잔 속에 잘 영근 달 하나 담가
컴퓨터 앞에 놓아두고
. . .
아무 말도 고이지 않은 맑은 수면
. . .
키보드 위에 가지런히 모아놓은 손가락들
꼼지락꼼지락 눈치만 보다
슬그머니 거리를 넓힌
검지 끝에 시작되는 세상 구경

부업삼아 회사 차려 폐업까지 시켜보고
갈 길 잃은 내 마음 심리 파악 완료
주인 찾은 강아지 소식에 가슴 쓸어내리다가
아차, 당근에 팔 물건 사진도 찍어야지
금강산도 식후경, 전국 식도락 여행을 빼놓으면 쓰나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제일인데
화면에 붙어버린 내 거북목을 어쩐담

찰랑이는 백지까지가 만리쯤은 되는지
돌아 돌아 겨우 띄워 놓은 첫 줄 위에

'날 좀 보소... '
줄지어 선 글자들 사이
깜빡이다 사라지고,
떠올랐다 가라앉는 커서

이러쿵저러쿵 어째저째 모여든 말들은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파일 더미 속으로 스며들어
깊은 밤만 되면 슬그머니 헤맨다는,

반토막난 감정들이 떠다니는
전설의

시 창고.


Read more

15. 탈주 스캔들 (15) - 취조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네

15. 탈주 스캔들 (15) - 취조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네

셋을 태운 보트가 외딴 무인도 해변에 선체를 마찰하며 멈춰서자마자 인하는 안도감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폭발하는 크루즈에서 나와 물을 헤치고 다시 뭍으로 올 때까지 쌓인 긴장감이 상당했다. “에스코트할께요, 형사님.” “손 치워라…….” “가만히 좀 계시겠어요?” 인하가 반발하든 말든 해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보트 비상함에 다행히 소독약과 붕대 등등이 있어서, 응급처치하는 건

By 가넷베리Garnetberry - 가넷베리의 숏텐츠
기록하는 자의 태도

기록하는 자의 태도

여러 번의 북토크를 진행하는 동안 관객들이 내게 가장 궁금해 한 질문은 이거였다. “기록하시면서 구술자의 어떤 모순을 발견하셨나요?” 순간 멈칫했다. 인간의 모순에 관심이 많다는 후기를 쓴 게 화근이었다. 내 구술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귓가를 때렸다. 당사자를 곁에 두고 그의 뒤틀린 삶과 모순을 발가벗겨 전시하라는 요구. 웃자고 하는 얘긴가?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이미지 출처: 드라마 《영 셸던》 공식 스틸컷 © CBS /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바위를 굴리는 데 필요한 85% _ 드라마 《영 셸던》

‘환승 이직’에 성공했다. 지난 몇 년간 위장병을 앓아가며 애써왔던 게 무색할 만큼 나의 거취는 빠르게 정해졌다. 이력서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간단한 지원 양식만 보고도 면접이 잡혔다. 내 일정에 다 맞춰주겠다 하여 기존 직장에 연차를 내지 않아도 됐다. 유달리 잘 본 것 같지도 않은 15분이 지나 이틀 후 합격 연락을 받았다.

By 이표(李表) - 표류일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손바닥을 펼쳐 휴대폰을 볼 공간조차 없었다. 불빛의 반사 때문에 손을 움직이다 보니 앞사람 팔꿈치를 건드렸다. 등을 찌르기도 하고 스치기도 했다. 앞사람과 뒷사람 사이 10센티미터 미만. 그 공간에 나를 밀어 넣었다. 낯선 사람들, 등짝의 뜨거움이 나에게도 전달됐다. 머리 위에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조차 땀을 머금은 끈적한 뜨거움을 식히지 못했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