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작

시 작

시-시-시-작!

동시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공포가 폐부로 밀려 들어와

 

눈동자를 굴리며 입 밖으로 도망친 음정들을 줍느라

노래는 늘 허리가 끊겼고

‘너는 꼭 부르다 말더라’라는 말은

주석처럼 달렸다

 

‘꼭'이라는 부사에 갇혀 첫 음은 다시 떼지 않았고

오물조물 입술만 움직이며

침과 함께 삼켜버린 것들로 키가 자랐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재능이라면

서론을 폐기하는 게 낫지’

혼자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고

슬그머니 익숙한 것들로 세상을 채우니

그제야 세계는 안전했다

 

간혹

형광펜 꽃이 핀 수학의 정석은’집합‘이 절정이었고

해마다 사 모으는 다이어리는 빼곡한 1월이 장관이었다

 

그렇게 앞 표지만 닳아버린 것들을 지나

연필을 쓰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는건

지우개라는 면죄부를 잃었다는 것

지우개가 소용없다는 건

함부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온 숨을 펜 끝에 모아

곧게 뻗으려 애쓰지만

뭉개진 볼펜 똥의 궤적 앞에서

다시는 선을 긋지 않으리라,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손을 유배시켰다

 

목 안쪽에 눌어붙어

영원히 소화되지 않을 것 같던

네 박자의 '시-시-시-작'은

숨결조차 굳어버린 어느 계절,

트림처럼 터져 나왔다

 

비릿하고 미지근한 공기가 알려주길

멈췄던 노래는 흉곽 안에서 흥얼대고 있었고

끝을 내지 않았으니 여전히 진행 중이라 했다

 

식은 손가락 끝으로 온기가 옮겨붙었다

 

주머니 속 손을 슬며시 꺼내본다

숨을 깊게 고르고

종이 위로 선을 그어본다

완성은 기약 없으나

다시,

 

시 작

 


어릴 적 누군가 노래를 시키면 늘 중간에 끊어버리곤 했다. 교과서는 학기가 끝나도 앞부분만 알록달록했다.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배우려 한 것도 한 가득 이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건 한계가 있었다. 책 한 권을 완독 후 다음으로 넘어가기보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다 끝을 맺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나를 하면 좀 끝을 맺어라."

이런 말을 듣다 보니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말조차 남들에게 하기 싫어졌고, 끝을 생각하느라 시도 자체가 두려워졌다.

그런데 과연, '끝'이라는 게 실재하기는 할까?
서툰 악기라도 문득 생각날 때 연주할 수 있고, 마음이 동할 때 캔버스를 채울 수 있으며, 알고 싶을 때 다시 책장을 넘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문제는 시도하지 않음이지, 끝을 맺지 못함이 아니다.
인생은 결국 마침표 없는 진행형이니까.

Read more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집에서 삶을 나누는 사람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촌수로 이어진 관계들이 있겠지요. 남편을 기준으로 하면  어머니,아버지, 그 위로 이어지는 할머니까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엄마, 아빠까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져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는 모두 같을까요?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축제가 끝난 뒤

축제가 끝난 뒤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체육대회가 끝난 운동장에는 종이 응원 도구 몇 개가 굴러다닌다. 하루 종일 울리던 음악은 멈췄고, 스피커에서는 잡음만 흐른다. 아이들은 하나둘 교문을 나선다. 반티 위에 겉옷을 걸치고, 친구들과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웃는다. “이 사진은 계속 봐도 웃겨” “내 표정 완전 이상해. 이거 반톡에 올린다.” 오늘은 분명 시끄럽고 즐거운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노트·수첩 : 思痕(사흔)

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