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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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큰 성인 남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리고 있다. 아이처럼, 굳이 자기의 눈물을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도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순간, 이럴 때 주의를 기울이는 건 예의가 아닌 듯했다. 부인인 듯한 여성이 남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여성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묻어 있다. 나는 대학병원 유방센터 대기실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다. 암 환자만 만날 수 있는 교수의 진료를 진즉 끝내고, 다른 교수에게 진료를 받은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지난 5년 동안 매년 초음파 검사와 진료를 받아왔던 터였다. 매년 한 번, 공교롭게도 생일 즈음에 생일파티 하듯 이 루틴을 치러 왔다.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 유방센터는 검사실과 진료실이 몰려 있어 여기를 드나드는 사람 대다수가 여성이다. 가끔 보이는 남성들은 환자의 보호자 자격으로 온 것일 테다. 사람들이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듯 보호자들이 보이는 위로 방식과 감정 표현 또한 제각각이다. 환자한테 화를 내듯 하는 남편들도 있고, 세상 살갑게 챙기는 아들도 보았다. 대개는 무뚝뚝 하게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수행하는 듯 보이지만 떨리는 목소리, 갈 곳을 잃은 손, 멍해진 눈동자가 이곳에 암 환자가 많다는 걸 상기시킨다. 오히려 환자의 얼굴에 표정이 없다는 것이 특이할 뿐.

 이번에 내 눈을 잡아끈 건 훌쩍거리던 남성이었다. 성인 남성이 우는 걸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남편은 위로인지 뭔지 모를, “항암이라도 안 하면 좋을 텐데”하며 말끝에 울음을 달았다. 아내의 고통과 그걸 지켜보고 무력감을 느낄 자신의 처지가 머리에 떠올랐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방금 나온 진료실에서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은 모양이었다. 암이라는 소리를 듣고 난 후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앞으로의 치료 과정에 대해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었다. 이른바 표준 치료가 정해져 있는 병이어서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환자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나야 뭐, 초음파 결과만 들으면 되니까 앞선 환자들처럼 울고 묻고 받아들이고 하는 과정 자체가 필요 없었다. 그저 “결과 보니까 괜찮네요. 깨끗해요. 내년에 다시 검사 받으시면 돼요”라는 말만 듣고 나오면 끝. 3분 진료가 아니라 1분도 안 걸리니 기다린 시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올해는 달랐다. 의사의 첫 마디가 “이제 그만 오세요”였으니까. 의사는 수술한 지 몇 년이 지났고 검사 결과도 깨끗하니 가까운 동네 병원에서 검사만 주기적으로 하라고 했다. 제일 가깝다는 동네 병원이 그 대학병원이라는 말은 시간만 지체할 무용한 TMI. 나는 “알겠다”고 답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름 ‘죽음’이라는 단어가 일상에 오래 맴돌았던 시기를 통과하고 이제는 중증질환자에게 부여되는 산정특례 혜택도 끝. 내 돈 다 내고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는 의미 외에 달라진 게 뭐가 있으려나. ‘철저한 식단 관리와 습관화 한 운동’ 따위 내버린 지 오래인데.

 나는 여태 대기실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저들이 시작하게 될 고통과 치유의 시간, 그 뜨겁고 절박한 세계를 훔쳐보며 불경하게도 나는 약간의 부러움을 품었더랬다.

이제 막 전쟁을 시작하는 부부의 비장함과, ‘환자’라는 옷을 벗고 밍밍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나의 시간은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일. 아무리 누군가의 끝과 시작이 바통 터치하는 이어달리기 같은 것이라 해도, 삶이란 참 얄궂다. 그렇다고 고통의 시간이 축복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러니 묘하다.

병원 문을 나서자 찬 바람이 훅 끼쳐 왔다. 보호받던 시절을 졸업하고 다시 세상의 기준이 적용될 맨몸의 시작. 그 시작이 산뜻하기보다 어딘가 서늘해서, 자꾸만 누군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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