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 유월 그리고 호야

세이, 유월 그리고 호야
Photo by H&CO / Unsplash

더듬더듬 어두운 공간에서 동공이 확장되어 물체의 윤곽이 또렷해지길 기다렸다. 끝없는 까만 복도 안에 우린 숨을 죽였다. 유월이 내 옆에, 호야가 내 품에 있었다. 경계 자세로 몸이 잔뜩 굳어 있는 호야를 가방 안에 넣었다. 어두운 복도를 유월과 나는 되도록 빨리 숨을 죽이며 발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까만 복도 끝에 있는 문 사이로 빛이 스미며 윤곽을 드러냈다. 다행히 그 문에 자물쇠는 없었다. 

문손잡이를 천천히 돌리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유월과 나는 두 눈을 마주치며 신호를 보냈다. 문이 열리는 틈에 문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밝은 빛이 쏟아져 두 눈은 하얀 백지상태였지만, 온몸에 부딪치는 것들을 무시하며 우리는 거침없이 앞으로만 달렸다. 우리를 잡으려던 손들은 미끄러지듯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그들보다 어린 우리가 좀 더 빨랐다. 좁고 가는 길로 달렸다. 굽이굽이 꺾어진 길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호야가 떨어질세라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제야 머리와 얼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땅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폴짝거렸다. 유월도 웃고 있었다. 한 손엔 호야를 안고, 한 손은 유월의 손을 잡았다. 우린 울었는지 웃었는지 모르게 적셔 들어갔다.

-우리가 맞았어. 
-아니, 세이 네가 맞았어. 난 솔직히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럼, 왜 안 말렸어?
-어차피 어느 쪽이든 죽음과 가까이 있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 그럼 이왕이면 같이 있는 게 재미있잖아.

도시가 바닷물에 잠기고 있다는 사이렌과 공중파 방송으로 요란했던 건 한 달 전이었다. 바닷물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건 이미 뉴스에서 1년 전부터 너무 많이 떠들어댔고, 재난 대비 훈련을 6번 정도 국가적으로 진행한 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디어 그날이 왔다고 생각하며 비상용품을 배낭에 챙겨 피난처로 모여들었다. 나는 피난을 위해 호야부터 챙겼다. 장기간 생존이 가능하게 설계된 지하 벙커에 사람들은 모였고, 그곳에서 앞으로 인간들이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바닷물로 도시가 잠겨 가망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국가적 미래 계획은 없어 보였다.

폐소공포증이 있어 약을 먹으며 버티던 옆집 태희 언니가 탈출을 시도했을 때, 나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보안 공무원은 태희 언니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사망했다고 확신하듯 얼버무렸다. 태희 언니의 엄마가 사망한 날짜라도 알려달라고, 장례라도 치르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안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얼버무리고 반복되는 말 사이에 빈틈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모르거나 숨기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매일 공기순환장치 아래에 향이 피워지고, 정시에 사람들은 모두의 이름이 한자로 적힌 벽을 향해 절을 했다. 처음엔 어디선가 나타난 선두 그룹이 의식을 행하면 그저 하나, 둘 따라 하는 분위기였다. 일주일 뒤엔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하고 있었다.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 주위로 경호하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모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절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어디에 닿는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허공을 향해 기도를 발사했다. 절을 하는 척 조용히 뒷걸음치던 나는 감시의 시선을 피하며 절을 하는 유월에게만 닿을 만큼 소곤거렸다.

-이상해. 의식을 지휘하는 선두 그룹 사람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
-어떻게 알아?
-내가 주목하던 사람들이 매일 자리가 한 칸씩 밀려나. 그리고 끝까지 밀리면 그 사람은 다음날 의식에서 사라져 있어.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 무심히 절만 하는 유월을 우두커니 쏘아봤다. 뒤돌아 흘깃거리는 눈을 피해 입을 닫았다. 나는 화장실 방향으로 몸을 틀어 걸으며 생각했다. 사람들이 교체된다는 건 통로가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단어로 정리했다.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생각해야했다. 그래야 문제가 풀린다.

 사람. 한자. 이름. 향. 절. 기도. 

 이것들은 설마......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눈에 닿는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한 단어만 떠올랐다.

'재물'

재물은 죽음으로 재를 마친다. 이곳의 재물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나에게 유일한 가족 호야. 그리고 유월과 함께.

취침 준비로 분주한 틈에 유월을 끌고 책상 밑으로 숨어 들었다. 

-나가자. 빠를수록 좋아.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이 안 좋아.
-세이야, 근데 우리 밖에 나가서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저 사람들 나랏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인데, 우리를 해할 이유가 없잖아.
-아니야, 느낌이 이상해. 아무래도 뭔가 찝찝해. 안전을 위한 감시가 아니라 도망을 위한 감시 같아. 장난 아니야. 

답답한 숨소리, 나의 안색을 보는 유월의 눈이 쌍꺼풀을 짙게 만들며 깊어졌다.

-그래서 계획은? 

계획대로 조용히 탈출 통로를 파악하고 그날부터 비상식량을 모으기 시작했다. 밖이 진짜로 물에 잠긴 도시뿐이라면 며칠이라도 생명을 유지할 음식이 필요했다. 도시락에서 보관이 쉬운 사과나 통조림, 주스를 주머니에 챙겨 배낭에 담았다. 집을 떠날 때 챙겼던 호야의 말린 고구마도 잊지 않았다. 시키는 일은 반항 없이 다 하며 직원들이 의심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오직 유월만 나를 은밀히 도왔다.

그렇게 탈출한 우리의 도시는 땅 위에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가 맞았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갇혀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나와 유월 그리고 호야는 아무도 없는 회색의 도시를 내려다봤다. 비가 잦아든 도시는 자욱한 안개로 잠겨 있었다.

-유월아, 어떻게 저 사람들을 모두 구할 수 있을까?
-찾아야지. 다 같이 살자. 살았으면 좋겠어.

벙커에서는 본 적 없는 길이 유월의 눈에 비쳤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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