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 : 편린

포스트잇 : 편린
@ Photo by pixels from Pixabay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할 때 포스트잇을 꺼내든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도, 당장 오늘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것보다 눈앞에 모든 내용을 무당이 쌀점치듯 흩뿌려놓으면 확실히 고민과 갈등의 시간이 단축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소재가 정해지고 취재가 끝나면 촬영구성안을 작성한다. 취재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트북 화면 안에서 이야기가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취재원의 매력을 1시간 내외의 영상으로 압축하기에 촬영거리가 부족하거나 너무 단조로워 흥미롭지 않을 때다. 

그럴 때면 나는 색색깔의 포스트잇을 꺼내든다. 

텅빈 종이 위에 생각나는 것들을 어지러울 정도로 적어나갈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을 지워가고 싶을 때다, 반대로 생각의 정리가 필요할 땐 포스트잇은 꽤 쓸모있는 도구가 된다. 

포스트잇 한 장에 촬영가능한 장면 하나씩을 적어나간다. 아침에 몇시에 일어나는지, 일어나서 이불부터 정리하는지, 토스트로 끼니를 때우는지, 아니면 밥과 국을 차려 먹는지, 대수롭지 않은 것들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수첩을 뒤적이고 또 뒤적인다. 

서사는 장면이 아닌 관계에서 나온다. 취재원의 독특한 매력은 대개 그런 사소한 관계에서 팔딱거리며 튀어 오른다. 

의미 없는 편린은 없다.

이번에는 다른 색상의 포스트잇에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소주제별로 적는다. 그리고 주제에 따라 일상의 편린들을 이리저리 붙였다가 뗐다가, 앞뒤로 순서를 바꿔가며 배치해 본다. 중얼중얼 입으로 이야기의 얼개를 짜본다.

 ‘이건 아닌데?’  싶다가도,  ‘그래 이거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의 결과에 도달한다. 

완벽한 촬영 구성이 없듯이 촬영 현장도 고정값이 아니라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더해지거나 덜어지고 바뀌거나 사라진다. 내향적인 취재원이 한 줄도 버릴 수 없는 주옥같은 인터뷰를 해줄 때도 있고, 돌발 상황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엎어지기도 한다. 태풍으로 스케줄이 취소돼 애써 짠 촬영 구성이 휴지 조각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뒤바뀐 촬영 영상을 보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 

집요하게 해체하고 합체하는 시간 속에서, 취재원과 조금씩 더 가까워진다.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일상이 다른 장면과 만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내가 누구인지 길을 잃어가고 있을 때도 나는 종종 이 방법을 쓴다. 나를 설명하는 단어를 낱낱이 흩뿌려 놓는다. 방송, 책, 음식, 출판, 문구, 이모, 딸, 번역, 도전, 한국사, SNS, 일본어, 에세이, 주식, 이사, 전주, 놀면서 돈 벌기….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남는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그것 같은 단어를 붙이기도 하고 너무 오래 붙어있던 단어는 떼어내기도 한다. 거듭하다 보면 낯설지만 익숙한 한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희귀한 세상이 되었지만,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날 때면 나는 그들의 노트 혹은 책상과 가장 가까운 벽면에 빼곡히 붙어있을 포스트잇을 상상한다. 버려진 숱한 포스트잇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 그리고 하나. 포스트잇은 위로 떼어내기보다 좌우로 떼어내는 편이 좋다. 위로 들추듯 떼면 가장자리가 들뜨지만, 옆으로 떼면 반듯하게 붙는다. 편린이 이야기가 될 때까지 포스트잇도 제자리를 지켜줘야 하니까. 

Read more

15. 탈주 스캔들 (15) - 취조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네

15. 탈주 스캔들 (15) - 취조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네

셋을 태운 보트가 외딴 무인도 해변에 선체를 마찰하며 멈춰서자마자 인하는 안도감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폭발하는 크루즈에서 나와 물을 헤치고 다시 뭍으로 올 때까지 쌓인 긴장감이 상당했다. “에스코트할께요, 형사님.” “손 치워라…….” “가만히 좀 계시겠어요?” 인하가 반발하든 말든 해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보트 비상함에 다행히 소독약과 붕대 등등이 있어서, 응급처치하는 건

By 가넷베리Garnetberry - 가넷베리의 숏텐츠
기록하는 자의 태도

기록하는 자의 태도

여러 번의 북토크를 진행하는 동안 관객들이 내게 가장 궁금해 한 질문은 이거였다. “기록하시면서 구술자의 어떤 모순을 발견하셨나요?” 순간 멈칫했다. 인간의 모순에 관심이 많다는 후기를 쓴 게 화근이었다. 내 구술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귓가를 때렸다. 당사자를 곁에 두고 그의 뒤틀린 삶과 모순을 발가벗겨 전시하라는 요구. 웃자고 하는 얘긴가?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이미지 출처: 드라마 《영 셸던》 공식 스틸컷 © CBS /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바위를 굴리는 데 필요한 85% _ 드라마 《영 셸던》

‘환승 이직’에 성공했다. 지난 몇 년간 위장병을 앓아가며 애써왔던 게 무색할 만큼 나의 거취는 빠르게 정해졌다. 이력서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간단한 지원 양식만 보고도 면접이 잡혔다. 내 일정에 다 맞춰주겠다 하여 기존 직장에 연차를 내지 않아도 됐다. 유달리 잘 본 것 같지도 않은 15분이 지나 이틀 후 합격 연락을 받았다.

By 이표(李表) - 표류일지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손바닥을 펼쳐 휴대폰을 볼 공간조차 없었다. 불빛의 반사 때문에 손을 움직이다 보니 앞사람 팔꿈치를 건드렸다. 등을 찌르기도 하고 스치기도 했다. 앞사람과 뒷사람 사이 10센티미터 미만. 그 공간에 나를 밀어 넣었다. 낯선 사람들, 등짝의 뜨거움이 나에게도 전달됐다. 머리 위에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조차 땀을 머금은 끈적한 뜨거움을 식히지 못했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