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플래그 : 나비, 날다

필름 플래그 : 나비,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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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날아앉았다가, 흔적 없이 떠나기를 

1. 고치-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촬영에도 외장 하드가 사용되지만, 내가 한창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시절엔  ‘촬영 테이프’라는 것이 있었다. 보통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 60분에서 90분 짜리 테이프가 100개에서 150개 정도 쌓였다. 촬영 기간이 길어지거나 대작(大作 )인 경우엔 이 개수를 훨씬 뛰어넘기도 했다. 

촬영이 끝나면 영상을 문자로 옮기는 ‘프리뷰 작업’에 들어간다. 촬영 영상의 내용과 현장음, 그리고 인터뷰를 기록한 프리뷰 노트는 프로그램의 뼈대를 만드는 기본 데이터다. 촬영 시간과 현장음의 밀도 그리고 인터뷰의 길이에 따라 테이프 1개당 A4 용지 30장 분량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렇게 100개에서 150개의 프리뷰가 쌓이면, 두꺼운 백과사전 두세 권에 맞먹는  분량이 된다. 

작가는 촬영테이프와 프리뷰 노트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짜기 위한 면밀한 분석에 들어간다. 나는 이 지난한 작업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하나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프리뷰 노트 가장자리에 촬영 테이프 번호에 맞춰 필름 플래그를 붙이는 일이었다. 작가들은 이 필름플래그를 ‘나비’라고 불렀다. 

2. 균열 – 너는 무엇을 꿈꿀까.

프리뷰 노트에 ‘나비’를 붙이는 일은 매우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었다. 테이프 분량이 50개 정도 라면 그럭저럭 할 만하다. 하지만 100개 가까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일'이 된다. 필름 플래그는 구분하기 쉽게 색색깔로 붙였다. 100여 개의 나비가 겹치지 않게, 간격이 흐트러지지 않게, 튀어나온 날개가 한 줄로 맞춰지도록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처음엔 붙였다 떼었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떤 때는 '적당히 넘어가자', 타협한 적도 있다. 하지만 한번에 쭉 100개까지 붙인 날은 인상적인 인터뷰나 현장음을 찾아내는 일이 수월했다. 어디로 날아가야할지 몰랐던 이야기의 가닥이 잡히고 흐름이 만들어진 순간. 흩어진 이야기 파편들은 한편의 60분물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그 과정이 거듭되며, ‘나비’를 붙이는 일은 어느덧 나의 가장 신성한 징크스로 남았다.

@ 작가의 기획으로 AI가 이미지화했으나 실제와 차이가 있습니다

3. 건조 – 나비가 스스로 날갯짓을 할 시간 

필름 플래그는 1968년 스펜서 실버의 ‘실패’ 덕분에 탄생했다. 강력한 접착제를 만들려했지만, 너무 약하게 붙고 너무 쉽게 떨어져 서랍 속에 갇혀있던 실패작은, 찬송가 페이지를 표시하고 싶다는 사소한 필요를 만나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어떤 도구는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로 거기 있다. 

어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로 거기 있다. 

나비는 잘 붙는 날도 있었지만, 어떻게 붙여도 삐뚤빼뚤한 날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또 그 성가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완전히 만족스러울때까지 나비와 씨름한다. 마침내 타협이 가능한 지점에 이르면 비로소 플레이버튼을 누르고  1초 1프레임, 한 장 한 장 프리뷰노트를 넘기며 이야기가 될 만한 파편들을 그러모은다. 이번엔 번호 대신 단어가 적힌다. 영상의 가장 눈부신 지점마다 오색의 필름 나비가 내려앉는다. 비록 얇은 비닐조각일지라도 필름 나비가 앉은 페이지는 특별하다. 나비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속삭인다. 

‘이 순간을 잊지 마세요. 여기가 당신 인생의 가장 눈부신 지점입니다.’

4. 비상 – 나비는 어디로 날아갈까.

침잠의 시간 끝에 균열을 겪은 나비만이 스스로 날개를 말리고 비로소 날아오른다. 

나는 오늘 인상 깊은 한 구절을 읽고, 그곳에 나비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넘겼느냐가 아니다. 어느 페이지에 당신만의 특별한 필름 플래그를 남겼느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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