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디오 스타일로펜 : 너의 쓰디쓴 밤을 나는 알고 있다

트라디오 스타일로펜 : 너의 쓰디쓴 밤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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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류라 불리던 것들의 낮은 반란

1. 나는 아류다

나는 만년필의 아류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고, 나 또한 그 시선을 부정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이유이자 숙명이었으니까.

내 고향은 일본. 내가 바다 건너 한국까지 진출했다는 건, 그만큼 내 존재가치가 인정받았다는 의미겠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넌 뭐냐?" 

"만년필이냐? 펜이냐." 

그렇게 묻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난 처음부터 만년필의 대체품으로 태어났으니까. 값비싼 만년필, 관리하기 까다로운 만년필, 일상적인 필기도구로는 조금 부담스러운 만년필. 우리 세계의 최상위 레벨이자, 왕족인 그 녀석을 대신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내 머리는 파이버 닙이라는 불리는 뾰족한 플라스틱 닙이다. 볼이 굴러가며 유성잉크를 서서히 밀어내는 아이들과는 피지컬부터가 달랐다. 내 몸엔 왕족의 피가 흐른다. 단지 그들처럼 금·은·동을 두르지 못했을 뿐. 나는 만년필보다 저렴하고 관리하기 쉽지만, 만년필만의 매력적인 필기감을 가졌다. 때론 아류라 업신여김을 당할 때도 있지만, 내 자부심은 남달랐다. 비록 역사는 짧아도 나는 종이 위의 르네상스를 이끈 혁명가였다. 이건 나의 정체성을 찾아 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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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류와 아류의 만남

한국에서 만난 내 운명의 주인은 TV교양프로그램 작가였다. 

그녀가 하는 일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촬영 현장과 산처럼 쌓인 테이프 사이에서, 차가운 팩트 위에 이야기를 불어넣는 고단한 노동이었다. 

그녀는 수첩에 나를 끼고 현장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동틀 무렵부터 어둠이 질 때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하얀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내 몸을 놀렸다. 

그녀는 내 뚜껑을 여닫는 걸 좋아했다. 아마도 열 때의 '탁', 닫을 때의 경쾌한 '탁' 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면서 '탁', '탁', '탁', '탁'. 어떤 때는 아다지오로, 어떤 때는 포르테로. 그러다 미끄러지듯 종이 위를 밀고 나가는 검은 잉크의 흔적. 주인은 내 닙이 만들어 내는 그 기분 좋은 저항감에 매료되었을 거다. 내가 주인의 작가 인생에 내 인생을 바치기로 작정한 것처럼.

3. 아류의 반란


하지만 방송국이라는 곳은 펜촉의 낭만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방송일이 결정되자, 그녀는 편집실에 갇혔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의미 없던 영상과 인터뷰를 한편의 이야기로 빚어냈다. 밤새 고뇌하며 써 내려간 문장들 위로, 선배 작가와 데스크의 붉은 펜 폭격이 쏟아졌다.

"이 내레이션은 임팩트가 없어."

"이 구성은 늘어져."

시뻘건 두 줄의 가로선과 거대한 엑스자가 종이 위를 점령해 나갈 때마다, 나는 주인의 떨리는 손가락 사이에서 버텨야 했다. 

주인은 나를 더 세게 쥐고, 붉은 상처를 하나하나 분해하기 시작했다. 죽은 문장의 마디를 자르고, 숨이 생생한 단어들을 골라 다시 대열을 맞췄어. 너덜너덜해진 원고 위를 나는 나의 날카로운 펜촉이 무뎌질 때까지 달렸다.

4. 아류라 부르는 자 누구인가

우리는 어쩌면 진짜 아류였을지도 모른다.

진짜를 흉내내는 존재.

하지만 세상의 삐딱한 정의 밖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쓰디쓴 밤을 문자로 풀었다. 

그리고 서툰 날카로움이 농익은 뭉툭함으로 자신을 증명해 냈을 때쯤, 텅빈 편집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든 세계를 마주했다.

"됐다."

그 순간 주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원한 해방감 대신 묵직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

마침내 편집실의 마지막 불이 꺼졌다.

너의 쓰디쓴 밤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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