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순간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순간
Photo by Christian Fickinger / Unsplash

버스의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 본다. 품이 넉넉한 스커트를 입고 모자까지 갖춰서 쓰고 있다. 할머니와 함께 해 온 세월만큼 여러 번 빨아 입은 티가 나는 옷이다. 비싼 옷은 아니지만 주름이 잘 가는 치마라 다림질도 꼼꼼하게 했으리라. 바닥에 앉아 다림질을 하는 할머니 모습을 그려본다. 할머니는 옷에 맞춰 신은 단화 안에 스타킹도 아니고 양말도 아닌, 얇은 나일론 소재의 양말을 단정하게 신고 있었다. 할머니의 스타킹 양말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온다.
저분은 분명 평생 나쁜 짓은 안 하고 산 사람일 거야.
맨발에 슬리퍼 차림인 너저분한 내 발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비록 내 발은 서늘하고 지저분해도 마음만은 좋다.

나이를 먹으니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위에 적어 내려간, 어떤 신발에도 양말을 챙겨 신는 나이 든 여성들처럼, 좋아하는 것, 혹은 반대로 참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 길어진다. 나는 나란 사람에 대해 점점 더 잘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일상을 좀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건,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점 얄팍해져 가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그러면서 대체 나이 들어서 좋은 게 무어냐고 항변했더랬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일들이 많아지고 그런 나를 발견하는 일이 즐겁게 느껴진다.

어릴 때 나는 눈만 감았다 뜨면 내가 원했던 장소에 가 있기를 바랐다. 드라마에서처럼 과정은 없고 시도와 결과만 있는 인생이길 소망했다. 세상사에 대해 뭣도 모를 정도로 어렸지만 ,과정이 주는 불편함과 고통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몇 분 정도로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스케치할 정도뿐인 드라마의 세계에서 살고 싶기도 했다. 굳이 해보지 않아도 과정이란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움을 동반한다는 건 아무리 경험치가 미천한 나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과정이 중요한 거지, 과정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능하면 나는 과정 같은 건 넘어가고 빠르게 결말에 도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 결말이 꼭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라고 해도 기다리는 건 지루하고 반복이 뒤따른다는 점이 무엇보다 싫었다.

지금은 안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의 진의를. 과정을 잘 치러냈다고 해서 결말이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도. ‘무엇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의 핵심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통해 사람이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어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알았다는 점은 큰 축복이 아니겠나. 물론 한편으로는 한가하게 소 풀 뜯어먹는 소리처럼 들릴 거라는 것도 안다. 자식을 잃고 살아가는 부모들, 성별 정정을 기다리는 트렌스젠더, 성 착취물의 피해자들이 사는 일상, 생사를 가르는 수술을 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과정’이란 단칼로 도려내 시작과 끝을 붙여버리고 싶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과정’에 관해서라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럴 때는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고, 그럴 때 내뱉는 말이란 내가 얼마나 납작한 인간인지 드러내는 구실밖에 안 된다는 것도.

그러나 일상의 ‘과정’ 안에서 우리는 마음을 말랑하게 만드는 순간을 만난다는 것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새벽 수영반에서 나이가 칠순을 넘긴 비슷하게 생긴 친구 혹은 자매가 매일 함께 수영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같은 것들. 함께 오고, 함께 수영하고, 함께 씻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왜 같은 레인을 쓰지 않고 다른 레인을 쓰는지에 대한 미스터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상상하다 보면 아무리 지옥 같은 일상이라도 조금은 견딜만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도. 그러니 산다는 건 고단한 일이지만 살다 보면 또 괜찮아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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