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중독자의 하루

카페인 중독자의 하루
Photo by Hümâ H. Yardım / Unsplash



굳이 이걸 이 시점에 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쯤에서 접고 그냥 한 잔 시원하게 마셔버릴까 하는 생각을 참는 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하루 종일 갈등 상황에 내팽개쳐진 기분이다. 대체 왜 이 고난을 사서 하는 건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마약이나 알코올도 아니고 그저 커피일 뿐인데.

시작은 그저 단순한 깨달음에서부터였다. 커피를 마신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머리가 아프고 하품이 나오면서 졸리기 시작한다. 그때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면 어느새 두통이 가라앉는다. 그 순간 ‘아, 내가 확실히 카페인 중독이 맞구나’싶다.
뭔가에 중독된다는 것이 산뜻한 기분은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감이 있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한때는 치매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고, 영화 <스틸 앨리스>는 차라리 공포영화에 가까웠다. 그러니 단순한 것이든 뭐든 뭔가에 중독된다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 그래서 상태는 고려하지 않고 이참에 끊어보자 했던 것이다.

시작은 간단했는데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축약되거나 미화된 부분이 바로 여기다. 현실은 사실 디테일에 있는데 말이다. 중독자가 몇 분 정도 괴로워하는 영상을 음악과 함께 그리는 건 사실 대단한 왜곡이다. 그렇게까지 격렬하지도 않고 영상미도 없고 지질하고 지루한 과정에 가깝다. 마약 중독자는 보통 몇 분 정도(영상에서) 괴로워하다 다음 장면에서 초췌하지만 말간 얼굴로 나타난다. 카페인 중독자의 경우는 어떨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하루 종일 커피 생각에 안절부절 하는 것이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 머리가 좀 아프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다. 이러다 두통으로 죽는 건 아닌가. 약간의 현실감각을 잃은 공포감이 올라오고 혹시 이게 카페인 중독이 아니라 뇌졸중의 전조증상이 아닌가 싶은, 역시 현실감각을 잃은 건강염려증까지. 뇌졸중이었는데 카페인으로 인해서 그동안 전조증상을 완전히 묵살해버린...건.. 아, 그만하고 일에나 집중해야겠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그동안 내 일의 성과는 카페인발이었다는 것을. 커피 없이는 왜 글을 한 줄도 못 쓰는 걸까. 이 정도면 글을 썼던 건 내가 아니라 커피였던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난 또 자괴감에 빠지고 열패감에 허우적대다 잠깐 소파에 앉아 풍경이나 보며 머리를 식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파에 앉기만 하려고 했는데 잠은 또 왜. 전날 분명히 8시간을 잤는데 이상하게 졸리다. 몸이 점점 가라앉고 그렇게 잠들었다가 낮잠을 내리 두 시간을 자버린다. 어우, 오늘 밤에 잠자기는 틀렸네.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커피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해보려 안간힘을 쓴다.
조금 노력하면 몸을 쓰는 일은 가능하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려고 할 때 습관처럼 옆에 가져다 놓은 커피 한 잔. 완전히 체득해 습관처럼 굳어진 루틴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일상생활은 가능하다는 걸 깨닫는다. 당분간은 집안일이나 좀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카페인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이 노력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가늠해 본다.
적어도 완전히 끊으려는 의도는 없다. 커피와 일상을 함께한 지 30년 가까이 되고 나름 몇 차례 커피를 끊겠다는 시도가 있었지만 완전히 끊는 데 (보시다시피) 실패한 건 커피를 안 마시면 사람들을 잘 안 만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안 마시면 마실 수 있는 게 없다. 차를 마시면 된다고는 하나 내게 차는 맛없는 생수를 조금 견딜만한 것으로 만드는 대체제일 뿐. 단 음료나 탄산음료는 아예 안 마신다.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건 나의 최애 모먼트. 커피가 없다면 그 순간의 즐거움은 가파르게 줄어든다.
그러니 한 잔의 커피는 만남의 순간을 위해 아껴두어야 한다. 비록 억눌러온 욕망이 터져서 두 잔 세 잔 연거푸 마셔버릴지라도.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과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한 타협점이 딱 거기다.

낮잠을 두 시간이나 잤으니 밤잠은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여덟시가 되니 잠이 쏟아진다. 설마 잠을 그렇게 잤는데 잠이 오겠어? 설마 했는데 잠이 온다. 그대로 잠든다.

Read more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집에서 삶을 나누는 사람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촌수로 이어진 관계들이 있겠지요. 남편을 기준으로 하면  어머니,아버지, 그 위로 이어지는 할머니까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엄마, 아빠까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져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는 모두 같을까요?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축제가 끝난 뒤

축제가 끝난 뒤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체육대회가 끝난 운동장에는 종이 응원 도구 몇 개가 굴러다닌다. 하루 종일 울리던 음악은 멈췄고, 스피커에서는 잡음만 흐른다. 아이들은 하나둘 교문을 나선다. 반티 위에 겉옷을 걸치고, 친구들과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웃는다. “이 사진은 계속 봐도 웃겨” “내 표정 완전 이상해. 이거 반톡에 올린다.” 오늘은 분명 시끄럽고 즐거운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노트·수첩 : 思痕(사흔)

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