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진 뉴스레터 05호
더듬더듬 어두운 공간에서 동공이 확장되어 물체의 윤곽이 또렷해지길 기다렸다. 끝없는 까만 복도 안에 우린 숨을 죽였다. 유월이 내 옆에, 호야가 내 품에 있었다. 경계 자세로 몸이 잔뜩 굳어 있는 호야를 가방 안에 넣었다. 어두운 복도를 유월과 나는 되도록 빨리 숨을 죽이며 발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까만 복도 끝에 있는 문 사이로 빛이 스미며 윤곽을 드러냈다. 다행히 그 문에 자물쇠는 없었다. 문손잡이를 천천히 돌리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유월과 나는 두 눈을 마주치며 신호를 보냈다. 문이 열리는 틈에 문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밝은 빛이 쏟아져 두 눈은 하얀 백지상태였지만, 온몸에 부딪치는 것들을 무시하며 우리는 거침없이 앞으로만 달렸다. 우리를 잡으려던 손들은 미끄러지듯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그들보다 어린 우리가 좀 더 빨랐다. 좁고 가는 길로 달렸다. 굽이굽이 꺾어진 길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호야가 떨어질세라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제야 머리와 얼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땅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폴짝거렸다. 유월도 웃고 있었다. 한 손엔 호야를 안고, 한 손은 유월의 손을 잡았다. 우린 울었는지 웃었는지 모르게 적셔 들어갔다. by 이안_이안의 숏텐츠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나무와 흑연의 향기, 종이 위에 스치는 서걱거림, 공들인 시간만큼 조금씩 닳아가는 그 감각. 그러나 연필에게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쉽게 뭉툭해진다는 것. 끝까지 샤프할 수 없다는 것. 이름처럼 샤프한 샤프의 등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샤프의 선택권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누군가 인생 샤프를 꼽으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제도 샤프’를 떠올린다. 까맣고 가벼운 바디, 얇고 정밀한 파이프. 그 시절 제도 샤프는 필통 속을 점령한 국민 필기구였다. 사실 제도 샤프는 일본 펜텔사 P205의 복제품이었지만, 나는 진품을 써본 적이 없었다. 비교대상이 없었기에 배신감도 없었다. 국산 제도 샤프 한 자루가 전부였다. 그런데 왜 하필 ‘제도’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제도 샤프, 그러니까 제도용 샤프란 자를 대고 정밀한 선을 그어야 하는 설계사나 건축가를 위해 촉을 길게 만든 샤프를 말한다. 정밀함을 강조하려는 마케팅의 한수였을까. 의도가 무엇이든 천 원으로 건축가의 정밀함을 살 수 있음에 홀렸다. 나는 그 가짜 도구를 쥐고 진짜 미래를 꿈꾸었다. 제도 샤프로 수많은 깜지를 써내려갔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도 샤프는 깜지 쓰기에 최적화된 도구다. 연필처럼 금세 뭉툭해져서 경계가 흐려지지 않았다. by 서사이_도구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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