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린 햇살

비린 햇살

4월의 햇살은 투명해서 숨을 곳이 없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참새의 부리에선

어제 누군가 뱉어낸 무관심이 뚝뚝 떨어진다

가장 작은 허기가 가장 낮은 곳을 쪼아대며

연명하는 정오의 비린내

 

길 위엔 제 몸의 무늬가 된

낡은 목줄을 감은 개 한 마리

체온을 기억하는 코끝이

온갖 것이 뒤섞인 바람 속에서

미열의 품을 찾아 킁킁거린다

 

대충 구겨 넣었던 포스트잇 한 장이

4월의 바람에 자꾸만 밀려 나와 팔랑거린다

 

끈기를 잃고 바닥을 뒹구는 기억이

가라앉고 싶은 침묵을 건드리면

줄에 매인 모든 존재는

밤새 식은 아스팔트를 견딘다

 

터지는 봄 꽃에

누군가는

하늘을 보고

누군가는

짓이겨진 이름표를 주우려

바닥으로 기운다

 

찰칵,

그리고 누군가는 팔을 뻗어

그 둘을 사각형에 가둔다

 

햇살의 찬란함은 그늘을 침범하지 않고

그늘의 서늘함은 빛을 가로막지 않는다

무엇도 서로의 계절에

함부로 뿌리 내리지 않는데

 

획을 잃어버린 이름 위로

무심하게 포개지는 분홍 꽃잎들

 

비누방울이

무지갯빛 숨을 부풀리다

터진 자리마다

끈적한 자국을 남기고

그 사이를

 

참새도

개도

나도,

뒤섞여 지나간다


기억의 이동과 소멸, 그 무심한 잔인함

Read more

내일이 지워진 세계, 당신의 일상에 연대를

내일이 지워진 세계, 당신의 일상에 연대를

2026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영화 <정거장>  고백하자면 나는 예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고작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난민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얄팍한 이미지뿐.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영화 <정거장>을 보겠다고 자리에 앉았을 때는 물론이고, 영화 속에서 파란 깃발과 주황 깃발로 대표되는 두 세력이 이란 같은 나라의 수니파와 시아파를 상징하는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꿈이 있습니까?" 소셜 미디어 릴스를 넘기다 길 가는 이들에게 불쑥 꿈을 묻는 인플루언서의 영상을 보았다. 어느 정도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꿈이라면 흔쾌히 들어주며 얼마 후 훈훈하게 콘텐츠를 마무리한다. 문득 길을 걷다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며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먹고사는 일에 치여

By 마침 - 명프로젝트 & 시필
우드 와이드 웹

우드 와이드 웹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숲속의 나무들은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뿌리, 각자의 줄기, 각자의 잎. 서로 닿지 않은 채 홀로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땅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다. 1997년 네이처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시마드 삼림생태학 교수의 연구 내용에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중력을 잃은 언어 (7) - 하나

중력을 잃은 언어 (7) - 하나

미나의 개인 인큐베이터 안으로 두드리는 진동음이 빠른 박자를 만들었다. 새벽에 겨우 잠든 미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어 빛을 받아들였다. 타미가 헤매는 미나를 억지로 부축하여 일으켰다.  - 아직 수면 시간인데 미안해요. 그런데 급해서요. - 아, 괜찮아요. 무슨일인데요? - 조이가 없어졌어요.  미나는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확 들어왔다. 정신없이 밀실로 달려갔다. 조이를

By 이안 -이 안의 숏텐츠